brunch

옛날 빌라의 낭만

재건축이 되면 이 곳 꽃나무들은 어떻게 될까?

by 김봉란
국민학교 시절 학교에 꼭 있던 등나무꽃. 사진 : Arcadia Studio

길을 가다 마스크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향기에 걸음을 멈출 때가 있다. 돌아보면 주로 연보랏빛의 라일락이다. 이번에는 약간 달랐다. 조금 멀리 산책을 나왔다가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난 것이다. 마스크를 살짝 코 밑으로 내리고 떠도는 공기를 힘껏 흡입했다. 어렴풋이 옛날에 씹었던 껌과 먹고 나서 킁킁거렸던 은박지가 생각났다.

고개를 올려보니 저 위에 하얀 꽃망울들이 보인다.
아! 아카시아구나!

작년에도 이 아카시아를 좀 따고 싶었다.
몇 줄기만이라도 꺾어 튀겨 먹고, 방울방울의 꽃잎이 매력적인 장아찌도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스리슬쩍 흘려보낸 봄을 아쉬워하며
내년을 기약했었다.

올해도 그리 될 것 같다. 하고는 싶으나 그만큼 간절하지는 않은가 보다. 봄은 주부에게 고된 시간이다. 제철 나물 맛이라도 보려면, 바지런을 떨어야 한다. 딱 요 때만 나는 쑥이라던가, 풋마늘대, 마늘쫑, 두릅, 명이나물. 여러 일로 몸과 마음이 분주한 올해, 장아찌는 못 담글 것 같아. 1년 내 밑반찬이 될 텐데두 말이다.

올려다본 아카시아는 너무 높았다. 나의 단신으로는 안 될 것이고 우리 집 최장신 남편이 나를 목마 태운데도 안 될 높이다.

권사님들은 내게 말씀해 주셨다.
아카시아를 따려면 청정 지역 가서 따야 한다고.
어디 멀리 산골이라도 다녀와야 하는 일이라니
또 내년을 기약한다.
이번 생에 아카시아를 먹어볼 수 있겠지?

아! 얼마 전엔 새로운 하얀 꽃을 발견했다.
아카시아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가로수로 흔한 이팝나무도 아닌 것이, 아이에게 뭐라 알려줄 수 없어, 하얀 꽃이다 넘어갈 뻔했다.

그러나, 이 좋은 21세기에는 스마트 렌즈로 꽃 이름 검색이 가능하지 않은가. 요즘 이 서비스 덕분에 꽃 이름을 하나하나 익혀가고 있다.

오래된 우리 빌라의 담장 끝자락에 무심히 펴 있던 녀석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화려함을 모르고, 겹겹의 꽃잎이 싸고 있지 않고, 색깔이 선명하지도 않다. 그저 들꽃 같은 야생의 수수함, 순백의 단아함만 있다.


눈을 깜빡깜빡 몇 번 하는 사이
핸드폰 화면에 꽃의 정체를 드러내는
그 이름을 읽어버렸다...
아니 얘가 그 꽃이라고?

식당 이름이나 문학 작품 속에 종종 등장해서
몹시 익숙한 탓에 얼굴도 모르면서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찔레꽃이란다.

잘 모르지만 늘 짝꿍처럼 따라붙는 단어가 있던데...
찔레꽃 향기?
꽃잎에 코를 가까이 댔다.
어머어머! 달근해라.

외양은 촌 말괄량이처럼 생긴 것이
풍기는 건 머리칼이 구불구불하게 어깨까지 내려온
아름다운 여성이 뿌리고 다닐 것 같은 우아한 향기다.

똑똑 박사 초록창은 이것이 먹을 수 있고, 심지어 건강에도 좋단다. 순으로도 먹고 꽃잎차로도 끓여마실 수 있다. 가을열매는 여자들 생리불순에도 좋다나!

찔레는 올봄에 새로 사귄 친구 중 으뜸이다.
헤어짐이 벌써 아쉽다.

이사 때문에 집을 알아보느라 어느 쌔 아파트에 구경을 갔다. 하늘을 다 가린 고층 건물 아래에는 신기한 놀이기구들 가득한 신식 놀이터가 있었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위해 들인 조각품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그러나 조경은 정말이지 재미없게 철쭉철쭉철쭉뿐이었다.

우리 빌라 단지에 산지 벌써 8년째다. 3개의 집에 살았다. 길가라 시끄러웠어도 제일 애정을 담아 예쁘게 페인트칠했던 신혼집. 아이들 키우며 층간소음 죄인으로, 노이로제 걸려 살았던 두 번째 집. 아랫집이 비었다는 소리에 도망치듯 옮겨와 맘 편한 파라다이스를 경험한 지금의 집.

최고층이 4층인, 낮고 아담한 건물들 사이사이 다양한 꽃들이 소담하게 펴 있다. 오래된 세월만큼 사귄 꽃 종류가 다양하다. 라일락, 벚꽃, 개나리, 철쭉, 겹황매화, 작약, 매실나무, 장미, 맥문동, 맨드라미, 수국, 등등.

특히, 2층 창가의 목련나무는 한강뷰 부럽지 않은 풍경을 선물해주곤 했다.



얼마 전엔 건너편의 오래된 주공 아파트 단지에서 멋들어지게 늘어트린 등나무 꽃을 봤다. 요즘 보기 어려운 건데. 나는 왜인지 이런 오래된 멋을 좋아한다.
이 동네가 사방팔방으로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꽃나무들의 운명은 어찌 되는 건가 오지랖을 부리며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걱정을 한다.


경제 논리로 당연하겠지만 모두 함께 고층 아파트에만 살아야 하는 것처럼 변해가는 주거문화가 못마땅하다.

옛날 동네는 싹 밀어버리는 거, 참 멋없다.

낭만은 그렇게 지워진다.


그럼에도 선택지는 별로 없어, 오늘도 아파트 하나 보고 오기로 했다. 나처럼 옛것이니 주택이니 전원생활의 로망을 가진 이들이 타협하듯 깨끗하고 쾌적한 아파트로 들어가, 그 안에 정글 화원을 가꾸었다는, 베란다 텃밭과 카페를 가꾸었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들의 뒤를 따르고픈데 식물 킬러로서, 식물은 집 밖에서 감상하자주의자인 나는, 음... 보테니컬 아트로 벽화를 그려보면 정 붙일 수 있으려나


덧말 : 주말에 야외에 드라이브를 갔다가,
지천에 널린 찔레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하. 내가 도시 바보라 또 몰랐던 거구만.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엄마가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