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마음읽기, 식물 읽기 ;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는 나만의 방법 (1)
6.마음읽기, 식물 읽기 ;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는 나만의 방법 (1)
요즘 얼마간 나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내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그리고 나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에게서…,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두드려 맞듯이 마음이 상처를 받고 나니, 청승맞아 보이기도 하고 어설프게 외롭고 괴롭고 우울해 졌다. 어설프다고 표현한 이유는, 요새 들어 슬프면 불안하고, 괴로워도 불안하다. 우울한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너무나 불안해진다. 불안하다는 마음이 모든 것을 대체하는 기분이 낯설고 묘하게 불쾌하다. 불안한 마음은 너무도 외로운 마음이다. 누구도 제대로 이해해줄 수가 없다. 너무도 외롭게, 홀로 불안에 떨고 있으면
“왜 지금 불안한 마음이 들어? 기이하네.”
하는 배려 없는 말도 들을 수 있다. 다시 원점을 찾아,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연달아 상처를 줬다. 나는 모든 마음이 불안으로 집결되는 것을 느꼈다. 이 불안만 잠재울 수 있다면 모든 마음을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 정도로 절박했다.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을 잃을 것만 같은 끝없는 불안함, 안지 얼마나 됐다고 나를 평가하는 낯선 이의 불쾌함. 이 두가지가 한데 얽혀서 계속해서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낯선 이의 판단은 무시하면 된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쉬이 정리되던가? ‘낯설다 보니 더 객관적으로 나를 평가할 수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은근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때 더불어 들었던 ‘누가 누굴 평가해?, 왜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는 거지?’ 하는 소심한 자책은 덤이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와중에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 말실수를 연달아 해서 상처를 받았다. 연달아 하는 실수는 과연 실수일까? 내가 지금의 야들야들한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아닐까? 하는 자기검열은 어째서 한 번도 거르지 않을까?
두 사건 이후로 부쩍 두리번 거리는 일을 숨기지 못하게 되었다. 스트레스를 받았고, 꼼짝없이 몸에서도 반응이 왔다. 마음에 상처받은 날은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것이었다. 심각했다. 잠결의 나는 종아리에서 피가 나도록 긁고 있었다. 팔도 다리도 두드러기가 올라오고 두통이 몰아쳤다.
마음을 읽고 싶어 졌다. 많은 이들의 마음을 모아서 모두 읽고 싶었다. 그래서 내 시야를 강제로라도 넓히고 싶었다. 남의 마음을 투시하며 읽기에 책만한게 없었다. 무엇보다 소설, 어떤 인물로 대변되는 ‘마음’을 읽어내기에 소설은 아주 안성맞춤이다. 실용서나 자기계발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알려준다면, 소설은 이야기 속에서 사람의 말과 움직임을 표현해서 ‘마음을 써 내린다.’
우울증이 문제일까? 나는 사실 글을 읽지 못한다. 오랜시간 집중해서 무언가를 읽었다면, 그 책 혹은 글은 아주 읽기 편하도록 퇴고를 번복한 글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조차도 적당한 리듬 속에서 글을(마음을) 쉽게 읽어내릴 수 있도록 쓰여진 훌륭한 글 일 것이다. 늘 읽으려고 노력한다. 나의 마음을 ‘쓰는’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다른이의 마음 곁에 다가가는 일이란 늘 상 어렵기 때문에 시도하고 또 시도 해야 한다. 마음에 와닿는 글 한자락을 읽고 나면, 한참을 반복해서 읽는다. 메모도 따로 해둔다. 그렇게 남의 마음을 읽어 위로받는다.
연장선에서 함께 하는 작업이 있다. ‘식물 읽기’이다. 식물 읽기는 어떤 식물이든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얼마전에는 소철의 새 잎을 가만히 관찰했다. 동글동글하게 매달려있는 잎이 멋지게 펼쳐지는 일을 관찰하는 것은 내 마음을 매우 두근거리게 했다. 생명의 움직임을 즉석에서 계속해서 바라볼 수 있었다. 내겐 영광이고 더불어 감동스러운 순간들이었다.
요즘은 잭클린(Jacklyn)이라는 식물을 바라본다. 아주 멋진 용처럼 날개를 뻗은 이 식물은 새 잎이 날때 꾸깃꾸깃 날개를 펼친다. 우리집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별 것 해준게 없는데 멋지게 대품이 된 식물이다. 가만 보고 있자면 잭클린은 작을 때는 귀여운 맛이 있었지만, 성큼 커지는데 아주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내 마음도 저렇게 성큼, 웅장하고 위대해질 수 있을까?
이 외에도 많은 식물을 길게, 길게 바라보며 식물의 노력에 내 마음을 빗대보며 마음을 읽어낸다. 느끼건데, 식물의 행위를 위대하게 칭찬하거나, 병에 든 식물을 연민하며 나는 나의 마음을 읽어내고 있었다. 내 마음 속에는 어떤 것들이 사나. 하는 궁금증으로부터 시작된 행위인 셈이다.
불안은 정상의 마음도 정상인지 다시금 의심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불안한 상황에 놓일 수록 자기확신이 떨어지고 다른 사람의 말에 크게 휘둘린다. 어쩌면 건강한 마음의 나였다면,
“뭐라는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하고 지나갔을 낯선이의 평가를, 뜨거운 감자를 두 손에 쥔 것 처럼 어쩔 줄 모르고 그대로 화상을 입어버렸다. 회복은 오롯이 내 몫이다. 나는 결국 이겨낼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을 할지는 차순의 문제이다. 1년에 한 장 날까 말까 한다는 소철잎이 펴지는 광경을 매일 관찰하며 식물등을 강하게 쬐어주었듯이, 상처받은 내 마음에도 그것이 나을 수 있는 적당한 사람과 식물의 마음을 가져다 주며 위로할 것이다. 온화한 마음을 한 가득 담아서 말이다.
누구든 별 큰 일 아닌 지적에 상처를 받을 때가 있다. 누구든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이 약하다고만 볼 수 없다. 회복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어떤 과정을 거쳐 회복하는지, 나를 보듬는지. 우리는 종종 가만히 그 과정을 살피어 따스한 품으로 안아줄 필요가 있다. 우리가 몰랐던 남의 마음과 식물의 성장과 회복을 바라보며. 지금, 새로히 시작해보는 나를 지켜보며, 당신의 마음 또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