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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정욱 Apr 19. 2020

18세기 유럽 최강자, 프랑스의 등장

대서양 시대가 지금 우리에게 말하는 것

<대서양 문명사> 리뷰 시리즈, 앞으로도 계속된다. 


1장. 대서양을 향한 이슬람과 포르투갈의 도전

2장. 15세기 에스파냐의 번영과 몰락

3장. 네덜란드, 국제적 네트워크의 출현

4장. 18세기 유럽 최강자, 프랑스의 등장
가 지금 우리에게 말하는 것



Q. 왜 프랑스는 중앙집권적 표준을 지향했을까?


18세기 유럽에서 규모와 인구,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프랑스는 항상 최강대국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으로 이루어졌다. 왜 프랑스는 중앙집권적 표준을 지향했을까? 그 이유는 지리적 위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섬나라인 영국에 비해서 프랑스는 주위의 강력한 표준들(베네치아, 교황청, 에스파냐 등)과 부단한 경쟁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점차 교황청의 개입은 약해지고, 서유럽 열강들이 독자적 표준과 서로 간의 합의를 모색하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치른 것이 아니라, 백년전쟁이 프랑스를 낳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전쟁이라는 긴급사태 속에서 국왕이 징세를 걷고, 법령을 반포하고, 적과 다투는 과정을 통해 중앙집권적 민족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사실, 그 이후에도 전쟁을 거치며, 전쟁 이후에 국가가 탄생한 사례는 아주 많다. 결국 죽고 사는 문제를 앞에 두고 '너와 나에 대한 명백한 분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백년전쟁을 다룬 '더 킹: 헨리 5세' 



Q. 프랑스는 왜 다른 이베리아 국가나 네덜란드보다 대서양 진출이 늦었을까? 


사실 대서양 시대 초기에 프랑스는 대서양이 있는 서쪽이 아닌, 이탈리아가 있는 남쪽으로 관심을 보였다. 당시 문명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의 선진 문화는 프랑스를 매료시켰고, 포크와 나이프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가 확산되고 전파되었다. 하지만, 속도가 빠르다고 무조건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앞선 국가들이 항로를 통한 중계무역을 하는 동안, 프랑스는 자국의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통해 국내 산업과 문화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반도 국가로 흘러들어온 부가 자연스럽게 프랑스로 흡수되는 결과를 낳았다. 전략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인상깊은 포인트였다. 



Q. 프랑스의 대서양 개척은 다른 국가들과 무엇이 다를까?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는데 바로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돈독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기존에 원주민과 개척인들은 갈등관계 속에 놓일 수밖에 없었지만, 프랑스인들은 "야만인들과 함께 야만인이 되는 정책"을 추구했다. 프랑스인들은 1608년 퀘벡을 장악함으로써 원주민들과의 모피 무역을 촉진할 수 있었고, 북미 지역에서 영국 대 프랑스의 대결 구도는 더욱 첨예화되었다. 이러한 다른 문화에 대한 연구들을 통해 프랑스는 언어학회를 주도하게 되었고, 이후 프랑스어를 중심으로 한 언어 및 지식구조 수립에 선봉장이 된다. 그 당시에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외교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해 보인다.


1660년 인디언 거주지에 도착한 피에르-에스프리 라디송



Q. 영국에 반격하기 위한 프랑스의 전략을 무엇일까?


프랑스의 마지막 반격은 바로 프랑스혁명으로 탄생한 공화국, 그리고 징병제로 인한 엄청난 군대의 등장이다. 무려 116만 명의 군인을 보유하게 되었는데, 규모 면에서 유럽 역사상 최대의 군대였다. 나폴레옹은 이를 기반으로 대륙 봉쇄령을 발포하며 영국과 대립했지만, 결국 워털루 전쟁에 패배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하나의 묘안을 더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수에즈 프로젝트였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당시, 프랑스는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여 영국의 우위를 뒤엎을 수 있는 획기적 시도를 탐색했다. 결국 영국의 지속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이집트는 공동 전선을 펼치고 끝끝내 운하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머지않아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국가가 되었다고 한다. 영국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운하라는 전략적 돌파구를 찾으려 노력했다는 점은 아주 인상 깊었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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