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선택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혼자 감당하도록 스스로를 몰아넣은 시간들을 반성합니다.

by 담하

나는 언제나 나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인내하고 견뎌서 해결되는 일이라면 늘 그렇게 해왔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일조차도 굳이 부탁하느니 혼자 해결하는 편이 더 편하다고 여겼다. 책임감이 강해서라기보다는 독립적인 성향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던 데다, 부탁을 하는 일이 왠지 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나를 희생시키는 게 가장 먼저인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나를 함부로 대한 것이라는 걸 말이다. 누구보다 내가 나를 아껴줬어야 했고 스스에게 미안해하며 소중히 대해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동안 ‘참는 사람’, ‘스스로 해결하는 사람’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그건 강인함이 아니라 혼자 감당하도록 스스로를 몰아넣은 시간이기도 했다.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 19살의 내가 처음으로 한 일은 공장 아르바이트였다. 내가 살았던 지역은 공단이 유명한 도시였고, 대학 등록금이라는 목돈을 마련하기에는 공장 알바가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3교대로 돌아가는 업무였고, 나는 타이어 안감을 짜는 일을 했다. 나에게 첫 사회생활이었다. 낮과 밤이 바뀌고 새벽 공기를 맞으며 퇴근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이라는 것이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경험과 노하우가 부족하다 보니 실수를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누군가의 화와 냉소적인 시선을 온전히 받아내야 하는 일도 있었다. 평소 다정했던 팀원의 언니가 나의 실수 때문에 얼굴을 굳히고 차갑게 대하던 날, 나는 집에 돌아와 펑펑 울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실수를 했으니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겠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서 갑작스럽게 돌변한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끝내 대학교 입학 전 3개월을 채우고, 한 학기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마련했다.


나를 희생할 준비는 일에서뿐만 아니라 나를 위한 선택을 할 때도 그대로 적용됐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 구한 집은 고시원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집을 구해야 할지 몰랐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기에 막연히 가장 저렴할 것 같은 곳을 찾아본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고시원은 좁은 골목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방을 고르는 데는 여러 선택지가 있었다. 개별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는 방, 공용 샤워공간과 화장실을 써야 하는 방, 내창이 있는 방과 외창이 있는 방 등 다양했다. 나는 가장 저렴하고, 공용 샤워실과 화장실을 써야 하고 내창이 있는 방을 선택했다. 외창이 없다는 것은 시계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조금 불편하겠지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지낸 지 3개월쯤 된 어느 날, 고시원으로 가는 좁디좁은 골목에서 나는 갑자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억눌렀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괜찮은 줄 알았지만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열심히 달려왔지만, 쓰러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나를 소외시켰던 선택들이 차곡차곡 쌓여 결국 무너진 것이다. '나만 불편한 걸 견디면 된다'라고 여겼단 미련한 생각은 낮은 자존감과 우울함, 번아웃을 불러왔다. 그 모든 선택에는 당시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어쩔 수 없거나 어쩌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여겨질 만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나를 보호해주지는 못했다. 나만 참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한 선택들은 켜켜이 쌓여 결국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때 나를 지키는 선택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조금 달라져 보기로 했다. 나를 좀 더 소중히 여기고, 나를 위한 선택들을 해보기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먹었다고 해서 30년 이상 쌓여온 습관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여전히 택시 타기보다는 걷기를 선택했고, 배달보다는 픽업을 택했고, 몸에 좋은 음식보다는 저렴한 음식에 손이갔다. '언젠가 바뀌겠지.'하고 내버려 두는 것만으로는 달라질 것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계획이라는 걸 세워보기로 했다.


먼저, 큰 결정을 할 때에는 진정으로 '나에게 좋은 선택'인지 깊이 고민하고 결정한다. 막연하게 나만 불편하고 참으면 된다는 생각은 버리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내 몸과 영혼을 해치지 않는 선택인지를 생각하고 결정한다. 또 일주일에 한 번은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나씩 하기로 했다. 일상에서 적당히 미뤄두었던 나를 위한 소소한 선택들을 꺼내서 실천해 보는 것이다. 가고 싶었던 카페 가기, 보고 싶었던 공연 보기,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며 쉬기, 핸드폰 없이 한 시간 걷기 등 특별하고 거창하지 않아도, 그저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고 나를 위한 선택을 '의식적으로' 해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상에서 나를 챙겨주는 습관들을 만들기로 했다. 귀찮아서 또는 세심하지 못해서 무심하게 넘겼던 것들을 하나씩 실천해 본다. 간편한 식사보다는 건강한 식단으로 몸을 챙기고, 몸이 건조하지 않도록 샤워 후 바디로션을 챙겨 바르고, 아침에는 차가운 물보다는 따뜻한 물 한잔을 마시는 것으로.


이렇게 나를 지키는 선택들로 내 시간을 하나씩 채워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의식적으로'가 아닌 '자연스럽게' 나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때가 올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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