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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오 Apr 04. 2019

그 얼굴에서 그대를 다 볼 수 있었다

오늘 날씨 맑음

그대와 나는 기나긴 시간을 떨어져 있었다
내가 많은 해를 먼저 났고
그대는 그곳에 없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대 없다 들은 곳에서 그대를 만나고 있었다
그것은 빛의 어느 파장이었고 바람의 어느 강도와 방향이 만드는 간지러움이었고
밤잠을 깨우는 타닥이는 비의 시간차였다
그대는 엄마가 찢어준 갓담근 김치 뱃살이었고
내가 제일 좋아하던 2바이4 레고 블럭이었고
어느 이들이 모른 체 지닌 살의 선들이었다
그대는 또한 시대를 틀린 옷들의 가랑이 폭이나 단추의 크기들이었고
버스의 엑셀레이션 소리에 묻힌 라디오의 목소리 조각이었고
무엇보다 저녁 5시에서 7시 사이의 모든 하늘이었다
때로는 지겨움에 소리내 읽고 하던 상점의 간판들에서
목욕탕에서 어느 아저씨가 뀌고 간 따뜻한 방귀방울에서
비처럼 떨어진 묵은 때의 시원한 으깨짐에서
콕 꼽은 바나나 우유의 노란 단맛에서
나는 또한 그대를 보았다
나는 그대를 정말 몰랐지만
어느 문장은 소리내서 읽었고
어느 문장은 종이에 굳이 적었으며
어느 이름없는 연출의 조잡스런 장면 앞에서 넋을 놓고 울었다
부모와 선생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글자가 없는 사막같은 것들을 자주 바라보았다
나는 그대를 정말 몰랐지만
그대를 마주칠 때마다 웃었다 자주 돌아다 보았다 자주 만지고 때로는 빨아 물다 등짝도 세게 맞았다
나는 이런 내가 되려고 한 적이 없다
다만 나는 당신을 이미 배운 듯 했고
당신을 맞춰 따라 가는 곳에는
어쩐지 내가 벌써 서 있었다
나는 그런 나를 주워다가 어른 키만큼 쌓아 갔다
어느 날 꿈같은 시간에는 지구가 사람 얼굴만큼 작았다
그래서 나는
걸음없이
시선없이
그 얼굴에서 그대를 다 볼 수 있었다

W, P 레오


2019.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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