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일기하기_오늘 날씨 맑음
살아난 할머니는
오는 자식들에게마다
죽고 싶다는 말을 연기를 한다
마음이 차오를 때까지
징그러운 그 말을 뱉고 또 뱉는다
커다랗고 하얀 병실이
가볍게 울리다가
어느새인가 어두워진다
세월이 가르친 연기는
대학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무겁다
꿈에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새장가를 가셨단다
일찍 가서 밉고
데리러 오지 않아서 더 밉단다
9층 병실에서 보는 하늘도 높은 가을이고
가을이 슬픈 엄마는 떠나보낼 것들이 가득이다
모아 놓은 돈이 없어 인사를 못 간 나는
학생이라는 말에 비겁하게 또 숨는다
더 어린놈에게도 길을 가르쳐준다
학생이라 글도 그림도 못 미덥고
보여주기에는 무섭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영화가 서랍 안에서 무겁다
쌓아가는 메모는 빚과 같아서
이제 좀 사람이 되어야지
좀 털어 갚아보려다
하나를 못 털어 갚고
파리로 갈 시간이 다 되었다
다섯 시면 고파서 못 견딜 배를 들고
말도 배워야 하는 곳으로 간다
잘 살고 있는 이들을 보고 오면
누군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한다
미안하다 말도 잘하면 능력이라면서
할머니도 엄마도 사랑도
내 머리를 쓸어 넘긴다
마흔이라 눈물은 안 날 텐데
흠칫 놀라 고갤 젖힌다
아픈 곳이 낮아져 간다
멀쩡한 얼굴에도
호흡을 찾으려 긴 산책을 하곤 한다
태풍이 끌고 온 추석에는
달이 밝다
고개를 숙이고 걸어도
달을 알겠더라
삶 같은 거에 쉽게 갖다 대면서
봐라 더 좋은 날이 온다고
한 번만 툭 터지면 된다며
꼬깃 모은 돈을 쥐어 주시고
한 번만 일어서면 된다면서
못 받을 돈도 또 주신다
마음이나 풀고 오라는 길에
나는 사랑의 손을 꽉 잡는다
인사도 다 못하고 간다
울 거 같아 도망처럼 뛰어서 간다
돈 대신 그림을 받은 적이 있다
돈 대신 미안하다고 적고서 나는 간다
W 레오
2019.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