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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오 Sep 14. 2019

돈 대신 미안하다고 적고서 나는 간다

시로 일기하기_오늘 날씨 맑음

살아난 할머니는

오는 자식들에게마다

죽고 싶다는 말을 연기를 한다

마음이 차오를 때까지

징그러운 그 말을 뱉고 또 뱉는다

커다랗고 하얀 병실이

가볍게 울리다가

어느새인가 어두워진다

세월이 가르친 연기는

대학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무겁다


꿈에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새장가를 가셨단다

일찍 가서 밉고

데리러 오지 않아서 더 밉단다

9층 병실에서 보는 하늘도 높은 가을이고

가을이 슬픈 엄마는 떠나보낼 것들이 가득이다


모아 놓은 돈이 없어 인사를 못 간 나는

학생이라는 말에 비겁하게 또 숨는다

더 어린놈에게도 길을 가르쳐준다

학생이라 글도 그림도 못 미덥고

보여주기에는 무섭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영화가 서랍 안에서 무겁다


쌓아가는 메모는 빚과 같아서

이제 좀 사람이 되어야지

좀 털어 갚아보려다

하나를 못 털어 갚고

파리로 갈 시간이 다 되었다

다섯 시면 고파서 못 견딜 배를 들고

말도 배워야 하는 곳으로 간다


잘 살고 있는 이들을 보고 오면

누군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한다

미안하다 말도 잘하면 능력이라면서

할머니도 엄마도 사랑도

내 머리를 쓸어 넘긴다

마흔이라 눈물은 안 날 텐데

흠칫 놀라 고갤 젖힌다


아픈 곳이 낮아져 간다

멀쩡한 얼굴에도

호흡을 찾으려 긴 산책을 하곤 한다


태풍이 끌고 온 추석에는

달이 밝다

고개를 숙이고 걸어도

달을 알겠더라


삶 같은 거에 쉽게 갖다 대면서

봐라 더 좋은 날이 온다고

한 번만 툭 터지면 된다며

꼬깃 모은 돈을 쥐어 주시고

한 번만 일어서면 된다면서

못 받을 돈도 또 주신다


마음이나 풀고 오라는 길에

나는 사랑의 손을 꽉 잡는다

인사도 다 못하고 간다

울 거 같아 도망처럼 뛰어서 간다


돈 대신 그림을 받은 적이 있다

돈 대신 미안하다고 적고서 나는 간다


W 레오

P Todd Diemer



2019.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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