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여동생 둘, 남동생 둘이 있다. 장손이라 조부모와 고모까지 가세하여 어머니가 나를 혼내기만 하면장손을 왜 야단치냐고 되레 어머니가 되레 혼이 났다. 요즘은 집집마다 자식들이 귀한 세상이라 남녀차별이 없지만 1960년대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남녀차별이 심했다. 장남이라고 용돈도 여동생들보다 넉넉히 받으니 여동생들은 돈 들어갈 일은 오빠에게 여우짓하고 돈을 쓰게 유도했다.
할아버지는 한우 99마리 소유자였다. 지금도 횡성에서 한우 99마리 키운다고하면 부자라고들 하는데, 1970년대 99마리는 동네 사람들이 정말 부러워하는 부자였다. 동네 친구들이 모두 검정고무신을 신을 때, 검은색 운동화를 신고, 책보를 사용할 때 가방을 사용했다.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망아지는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라는 말을 믿고 장손을 서울로 보냈다. 지금은 <강림중학교>가 있지만 초등학교 시절 선배들은 중학교 다니기 위해서 자전거로 안흥 중학교로 통학을 하거나 원주중학교 주변에서 하숙이나 자취를 했다.
원주서 자취하는 동네형들은 토요일에 집에 왔다가 원주로 나갈 때 버스를 타지 못하면 무거운 쌀자루를 배낭처럼 메고 강림서 출발하여 노고소와 태종대를 지나 부곡에서 고든치를 넘어 원주로 향했다. 이 길이 태종이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이 된 후에 운곡 원천석을 찾아왔을 때 노고소에서 노파에게 거짓말을 사주해 태종일행을 수레너미로 따돌리고 원천석이 변암으로 들어간 길이다.
고든치 길은 등산 코스로 절경이고 수레너미 길은 자전거나 승용차로 드라이브로 좌우 결경이 펼쳐진 잘 알려지지 않은 길이다. 아직까지는 오염이 덜된 자연을 잘 보존한 곳이다.
조선시대 강림은 각림사라는 절이 있었다. 이 절 한 칸에서 이방원이 운곡 원천석에게 글을 배웠다. 세월이 흘러 제자가 왕위에 오르고 은사님을 뵈러 왔다. 자신이 가르친 제자가 왕이 되었으나 운곡은 고려의 신하요 학자지 조선의 어용지식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더 중요한 것은 인의예지신 오상을 가르쳤건만 전혀 인을 모르는 짓을 했기에 피한 것이다.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노파에게 뒤에 오는 사람이 앞서간 선비가 어디로 갔느냐 물으면 동으로 갔다고 대답하라고 했다. 노파는 대답을 하고 보니 가마에 용이 그려진 것을 보았다. 임금님 일행에 거짓말을 했으니 차후 죽을 것이 뻔했다. 그 자리서 물에 자진했다. 이곳 명칭이 노고소다. 노고할미가 빠져 죽은 늪이라는 뜻의 <노고소>가 되었다.
태종 일행이 머문 곳에 정자를 지은 것이 태종대이다. 노파의 거짓말에 태종 수레가 동으로 넘어간 곳이라고 <수레너미>가 음이 변해 <수리네미>로 불린다.
해마다 강림면에서 노고 할미의 넋을 기리는 <노고문화제>가 열린다.
어린 시절은 원주서 강림을 왕복하는 버스가 아침에 나가는 것 1회 저녁에 들어오는 것 1회였다. 장손에게 하숙이며 자취가 뭐냐 하시면서 소 몇 마리를 팔아 서울 D초등학교로 위장 전학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수도권 인구 집중 막는 정책으로 서울서 지방으로 이사는 그냥 했으나 지방서 서울로 이사는 관할 읍면동사무소 확인서가 필요했다.
그 시절 안흥면서기 월급이 채 만원이 안 되던 시기에 안흥면장에게 2만 원 강림출장소장에게 만원 서울 지금 신길 6 동장 그 시절 대방 2 동장에게 3만 원의 촌지를 쓰고 서울 D초등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전학한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담임이 가정방문을 해서 실제로 온 가족이 전부 이사했는지를 확인하여 남부교육청으로 보고해야 전학이 완성되었다. 실제로 전학 왔다가 가정방문 결과보고에 전가족 이사 아니고 부분 전출입 보고로 전학이 무산된 경우도 있었다.
담임이 가정방문을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 셋이 사는 집에 주민등록은 어머니 아버지도 등재되었다. 담임에게 할아버지는 봉투를 드렸다. 아마도 대방 2 동장에게 드린 만큼 드린 것으로 짐작했다. 여름방학에 만화영화를 횡성극장서 보자고 여동생이 꼬시는 바람에 셋이 영화를 봤다.
완전정복을 전 과목 산다고 돈을 타서 국어, 영어, 수학만 사고 나머지는 비자금 형성한 것인데 그날 여동생 둘을 데리고 영화 보고 간식 사 먹은 것이다. 여동생들에게 입단속을 했다.
절대로 어른이 영화 본 거 알면 오빠가 혼나니까 비밀로 하자고 새끼손가락 걸어 약속했다.
다음날 아침 밥상에 온 식구가 밥을 먹는데 큰 여동생이
<오빠! 오빠! >
<왜?>
<우리 어제 영화 안 봤찌?>
<응 안 봤어!>
어머니가 극장표 돈 출처를 추궁했고 완전 정복을 전 과목 새것으로 산다고 돈을 타서 국어. 영어. 수학만 새책으로 사고 나머지 과목은 종로6가에서 헌책으로 사서 영화 봤다고 말했다. 그 즉시 용돈은 50% 삭감을 당했다.
여동생이 착한 일도 했다. 장교 후보생 시절 축제 직전에 여자에게 차였다. 헤어지더라도 이번 축제 파트너 한 번만 해주고 헤어져달라고 애원해도 그녀는 냉정하게 떠났다.
어린 시절 오빠 우리 영화 안 봤지 해서 어머니에게 죽도록 매를 맞고 용돈까지 삭감당하게 한 여동생에게 축제 파트너 부탁을 했다. 축제에 입고 갈 옷이 없다고 해서 청주에서 가장 옷을 잘 만든다는 의상실에 데리고 가서 빨강 쓰리피스옷을 해 입혔다.
이 사진은 지금은 폐간되어 구할 수 없는 잡지 <리더스 코리아>에 여동생이 오빠 축제에 애인으로 잠시 참석한 사연을 보낸 것이 기사화되었다.
세월이 흘렀다. 나도 60이 넘고 여동생도 60이 넘었다. 그 곱던 얼굴에 주름이 늘고 검은 머리 절반이 은색이 되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이제 내 자식들과 조카들 결혼 소식이 들려온다.
우연히 앨범을 뒤지다가 학군단 축제사진이 나왔다.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여동생이 투고했던 리더스코리아의 글을 읽었다. 감회가 새롭고 이선희의 노래 <아~옛날이여>를 외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