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이 4월이라 소띠들은 모두 취학 통지서가 나오고 호랑이띠들은 1.2.3월이 생일인 어린이가 취학 통지서가 나왔다. 검정고무신을 두 개를 연결해 모래를 실어 나르는 놀이를 하던 길수, 인수, 창수, 재집이 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고 나 혼자 놀자니 심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중학생 형들은 1학년이 2.3학년 선배들에게 충성! 거수 경례하는 것을 보니 고무신 놀이 친구 길수, 인수, 창수, 재집에게 중학생이 되면 충성!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잠이 안 왔다.
엄마가 물었다.
"아들? 잠이 안 와? 무슨 고민 있어?"
"예, 길수, 인수, 창수, 재집이랑 진구인데 중학생 되면 충성! 경례해야 하는데 그냥 입학해 동급생 하면 경례 안 해도 되는데."
역시 엄마는 영원한 아들 편이었다.
아버지 건너뛰고 서당 훈장을 하신 할아버지께 당신의 장손이 중학생이 되면 동네 친구들에게 거수경례하고 충성! 큰소리 구호한다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니 손자 늦었지만 입학시켜 달라고 했다. 일이 되려다 보니 교장선생님은 할아버지께서 서당 훈장 시절 제자였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학교에 가니 추 모 교장 선생님이 할아버지에게 90도 인사를 하시면서 훈장님이 웬일로 오셨냐? 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엄마가 일러준 대로 우리 장손 친구가 죄다 1학년인데, 내년에 장손이 입학하면 중학생이 되어 친구 후배로 충성! 거수경례를 해야 한다. 2주 지났지만 입학받아달나고 했더니 교장 선생이 할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 입학을 받아주고 교무실에서 1학년 수업이 끝나자 담임 선생님이 2주 동안 배운 것을 특별 과외 지도를 했다.
1.2.3학년 열심히 공부해도 7등에서 10등 사이를 오르내렸다. 솔직히 말해 변명이지만 취학 연령이 1년 바른 친구들과 편법 입학을 했고, 키도 몸무게도 친구들보다 약했다. 3학년 때 누에가 한창 자라는 시기에 윈주여고생이라고 목에 깁스 한 막내 이모가 왔다. 엄마 말이 조카가 공부는 열심히 하는 거 같은데, 맨날 7등에서 10등 사이인데, 1등 만들면 누에 팔아서 너 사달라는 거 다 사준다고 하고 불렀다.
국어,산수,사회,자연 배운 부분을 물어보더니 그럼 되겠다고 하며 나를 집밖으로 데리고 갔다.
"문평이 너 공부 1등 하고 싶니?"
"예."
"그럼, 이건 비밀인데, 엄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아무도 모르게 엄마가 뽕으로 키우는 누에 살아있는 거 두 마리를 아무도 모르게 장독대에 가서 그릇에 깨끗한 물을 북두칠성 향해 놓고 절을 세 번 하고 누에를 먹고 나서 세 번 절하면 다음 시험부터 1등 하거나 공동 1등 할 거야. 알았지?"
"예."
그 시절 원주여고는 중학생 중에서 시험으로 선발되어 학생들이 1등부터 꼴찌까지 목에 깁스하고 다녔고 그 깁스 막내이모 말이니 비밀로 어른 네 분 모르게 누에 두 마리를 장독대에서 꿀꺽 삼켰다.처음에는 토할 것 같았는데 물을 마시니 가라앉았다.
기적이 일어났다. 기말시험에 늘 1등 하던 여자애와 공동 1등이었고 누에고추 판 돈에서 엄마는 막내 이모에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모르게 기타를 사주셨다. 그녀와 월말고사,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1등 자리를 두고 엎치락뒤치락을 했다. 6학년이 된 첫 주에 서울로 전학을 왔다. 58명 중에 1등과 2등을 교대로 했는데 전학을 오니 6학년 8반 78번이었다. 반도 8반까지는 남자반 9반부터 15반은 여자반이었다. 월말 시험에 78명 중에 40등을 했다. 눈물이 났고 어머니 생각이 났고, 공부가 싫어졌다. 고향 친구 57명과 담임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처음은 담임 선생님 포함 40여 통의 편지가 왔다. 답장을 해주고 차츰차츰 줄어들었다. 중학생이 되어도 1등을 두고 다투던 그녀와 편지는 계속 유지되었다.
고향 강림에 중학교가 없었는데, 전학을 온 시기에 중학교가 생겼다. 정상적으로 횡성교육청이 예산이 있어서 학교를 세운 것이 아니라 '김광수'라는 사람이 함경도 북청 사람인데, 홀로 남한에 내려와 억척스럽게 일을 하고 돈을 모았다. 그 시절 촌에서 재산 모으는 것은 땅이거나 소였다. 한우 100 마리가 그의 재산이었다. 한 겨울에 동사를 했다. 그의 상속자가 없는 것을 알고 전국에서 10여 명의 상속자가 나타났다. 횡성경찰서에서 사실 조사를 했다. 모두 거짓으로 판판되었다. 횡성군에서는 소 100 마리를 국고에 귀속시키는 것과 강림을 위해 사용할 것을 고민하다가 강림 지역 유지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강림 유지들이 강림에 중학교가 없으니 학교를 세워 기부채납 형식으로 하면 설립자는 김광수지만 학교 유지에 드는 경비와 교사들의 월급은 공립교사 월급으로 할 수 있다고 했다.
학교가 설립되고 그녀는 강림중학교 2회 학생이 되었다. 강림중학교를 졸업하고 막내이모가 졸업한 원주여고에 합격을 하고 연락이 왔다. 내가 살고 있는 대방역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녀는 시험으로 명문 원주여고 예비1학년 나는 서울 뺑뺑이로 검은 돌 고등학교 예비1학년으로 대방역에서 만났다.
대방역 플랫폼에서 그녀를 만났다. 교복을 벗어던지고 상의 눈부신 백색 블라우스에 하의는 연분홍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그 뒤에 그녀의 강림중학교 성함은 잊었는데, 여자 선생님이 후견인 보호자로 서 있었다. 그녀가 인사하라고 해서 '처음 뵙겠습니다. 대방동 성남중학교 25회로 졸업을 하고 흑석동 검은 돌 고등학교 예비 1학년 함문평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어머 은경이가 문평 학생을 엄청 좋아하나 봐. 어제 잠을 한숨도 못 잤어라고 했다. 저도 못 잤습니다라고 했다. 선생님은 둘이 좋은 시간 보내고 2시간 후에 대방역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셨다. 그녀와 나는 대방 지하차도를 지나 샛강으로 갔다. 지금은 샛강이 잘 정비되었지만 1977년 2월 샛강은 정말 볼폼없었다. 그래도 둘은 행복했다. 앙상한 나무 아래서 키스도 했고,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학교에서 만나자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서울대학교 수학교육과에 재수 없이 바로 합격을 했고, 나는 재수, 3수를 해서 청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할아버지는 소를 더 팔아서라도 4수를 시키겠다고 하셨는데,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징집연령을 낮추었다. 1982년 대학생이 못되면 논산훈련소로 입소를 해야 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태클을 건 인간이 박정희, 김재구, 전두환이다.
박정희가 유신으로 장기 독재가 아닌 3선에서 정권을 이양했다면, 김재규가 조금만 더 인내심이 있어 박정희를 시해하지 않았다면, 전두환이 12.12군사반란만 아니라면 어쩌면 그녀와 동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누에 덕분인 것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데 사범대학에 다니면서 교육심리를 배우고 이해가 되었다.
누에를 먹고 공부 잘하게 된 것은 북두칠성에 기도한 기돗발도 아니고 플렉시보 효과라고 짐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