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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마음 하얀 마음 10

가경 선생 어록 5

by 함문평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다.

영원히 대동아공영권을 꿈꾸던 다카키 마사오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자신의 팔을 꼬집었다. 아팠다. 오카모토 미노루 다카키 마사오 이름을 버리고 다시 박정희 이름을 사용했다.


조선인을 토벌하던 관동군 흔적을 지우고 무늬라도 광복군으로 변신했다. 박정희와 방원철은 관동군에서 광복군으로 변신했다.


8월 17일에 박정희 이주일이 중국군에 투항했다. 광복군은 김구 주석이 독립국가의 군대로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그 시절 우리 수준으로는 장개석 군대의 중국군사위원회의 일부였고 군복도 휘장도 장개석 부대의 신세를 지고 있었다. 고 장준하 선생의 글에도 그 내용은 나오는 것으로 봐 가경 선생 말씀은 진실이다.


장준하 김준엽은 국내 진공을 위해 유격훈련을 받았지만 박정희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러니 박정희가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었으니 대통령이지 장준하는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박정희와는 비교 대상도 아니고 장준하는 박정희를 속으로 국어사전에 나오는 최대한의 욕을 했을 것이고 박정희는 권력은 잡았지만 영원한 열등의식을 극복할 수 없었다. 심리적으로 열등자가 우월자를 이기는 방법은 자살을 가장한 타살이 빙고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4.19 한 돌 기념일에 맞추어 학생들이여 궐기하자 4.19의 피가 헛되었다. 이런 사회를 만들려고 우리가 피를 흘렸는 가로 시작되는 전단을 만들어 대학가에 뿌렸다. 하지만 4.19 일주년에 시위가 너무 질서 있게 진행되자 박정희 김종필은 난감했다. 눈물을 머금고 쿠데타 계획을 연기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가 이끄는 쿠데타 군인들이 방송국과 정부기관을 점령했다. 아나운서 중에 목소리가 우렁찬 박종세 아나운서가 혁명공약을 낭독했다.


박정희가 반란수괴라면 김종필은 감독 기획 연출 자금을 담당했다.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 동참했다.

이주일 김동하 김윤근 박치옥 문재준 김재춘 등에 김종필 동기들이 대거 합류했다. 이석제 오치성 김형욱 길재호 옥창호 신창윤 등이다.


쿠데타 소식에 장면 총리는 혜화동 수녀원으로 도망갔다. 처음에는 미 CIA서울지부장 집에 갔으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수녀원으로 피신한 장면과 달리 윤보선은 가족들을 피신시키고 자기는 청와대에 남아 있었다. 맥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이 반란군 진압명령을 요청해도 윤보선은 김일성 핑계를 대고 진압명령을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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