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윌 26일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김종필이 민주공화당 총재를 맡았다. 소감을 말하는 중에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다는 중국 고대 시인의 말을 인용했다.
어쩌면 그리 딱 맞는지 신내림 받은 무당소리라며 가경 선생은 박정희 무덤에 조갑제가 침을 뱉으라는 책이 나오기 전에 침을 뱉었다.
가경 선생의 말씀을 요약하면 욕심을 부려도 정도껏 부려야지 3선도 선진국이 시도하지 못하는 제도인데 지가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미국 영국 독일이 시도하지 못하는 3선을 했으면 종필이나 영삼이 대중이여 게 기회를 주어야지 총 맞아 뒈질 때까지 하는 게 인간이냐고 일갈하셨다.
가경 선생과 나의 아버지 두 분이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1번을 1750명이 찍었는데 2번을 찍은 50명에 들어서 중앙정보부 강원지사에서 책임자가 횡성군 안흥면 강림리 775번지에 왔다.
어르신 위해 저희가 돈도 드리고 녹용도 드렸는데 2번을 찍으시면 되겠습니까라고 따지는 중정요원에게 선생은 비밀투표인데 너희들이 투표용지를 보았느냐 그럼 그 죄를 알겠지 하자 다들 도망갔다.
지금은 인구가 줄어 각림초등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해 있지만 당시는 전교생이 600명이었고 투표인원이 1800명이었다.
그중 50표가 야당표가 나온 것은 축구 경기로 치면 5대 0으로 이길 경기를 5대 5로 비긴 것만큼 안기부 강원지부는 자존심이 상했다.
세월이 흘러 가경 선생이 장손 교육을 위해 흑석동에 거주했다. 연못시장 복덕방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손자에게 태자마마가 누군지 아냐고 물어서 신라 마지막 왕의 아들이 마의태자 아닙니까 했더니 그래 마의태자를 그리 알고 있는데 요새 최태자마마라는 것이 일제강점기 황해도서 순사 나부랭이 하다 공산당이 친일한 놈 찾아 죽인다고 하니 무서워 남한으로 내려와 영생교 교주가 되었는데 육영수 목소리를 흉내 내서 영애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런 말씀하시면 큰일 난다고 다시는 입밖에 내지 마시라고 했는데 30년 후에 최순실 국정농단을 보니 아이고 가경 선생 말씀이 유언비어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민주공화당 배지
가경 선생 아들이고 나의 아버지는 민주공화당 창당요원이었고 민주공화당 원내총무를 지낸 김용호의 안흥 강림 부곡 월현을 총괄하는 주직책이었다.
선거 때마다 엄청난 선거운동 비용이 신문지에 둘둘 말린 뭉치로 라면 상자에 담아 우리 집으로 우체국 소포로 위장하여 도착했다.
아버지는 온 식구를 동윈 해 누런 봉투에 3장씩 넣은 봉투 500개 1장씩 넣은 봉투 1000개를 만들어 은밀하게 발품을 팔아 그 사람의 동네에서 영향력을 판단하여 한 장 봉투를 전하거나 석 장 봉투를 전달했다.
그렇게 주천강을 건너고 수레넘이 고개를 넘고 배향산을 넘어 고생 고생 선거운동을 해도 개표 결과는 신민당 박영록이 8만 표 얻을 때 김용호는 3만 9천 표였다. 간신히 은메달 그것도 하프게임으로 끝나 아버지는 원주 민주공화당지부에서 늘 죄송하다고 했고 김용호는 그래도 함 선생 덕분에 횡성 안흥 강림서 이겼다고 말했다. 원주는 도시고 시골서 아무리 표 모아봐야 도시에서 야성을 이길 수 없는 구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