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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문평 Jan 12. 2024

단편소설

07. 진품명품

  서기 2029년 5월 17일이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 5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TV 쇼! 진품명품>에 ‘전두환 회고록 1권’이 출품되었다. 사회자 윤영구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시작했다.

  “시청자 여러분!

내일이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50년이 되는 날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5번이나 강산이 변했을 시간이 흘렀습니다만 과연 우리는 50년 전의 그날보다 행복한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었는가 반문해 봅니다.

    오늘 진품명품 시간에는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작품을 첫 번째로 소개합니다. 의뢰인 앞으로 나오십시오.

   의뢰인이 TV 쇼 진품명품 감정단의 출연 손님과 감정위원 그리고 방청객의 박수를 받으며 단상 앞으로 나갔다.

  “초대 손님으로는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던 ‘송 해’ 선생의 조카 송시현 씨, 가수 ‘양희은’ 씨의 조카 양세돌 씨 그리고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 사업회 초대 회장의 아드님인 임선중 씨가 나왔습니다.”

  - 자 그럼 의뢰인에게 묻겠습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신가요?

  - 예,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서 온 함춘식이라고 합니다.

  - 가지고 나오신 물건이 무엇인가요?

  - 전두환 회고록 1권입니다.

  - 왜 하필이면 1권만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 예, 전두환 회고록은 모두 3권으로 되어있는데, 2,3권은 시중에 많이 팔려나갔고 1권은 출판되자마자 광주에서 <판매금지 신청>을 법원에 제출한 것이 법원서 금지처분을 내려 1권은 모두 회수하여 출판사에서 자체 소각을 했다고 합니다.

  - 그런데, 어떻게 의뢰인은 판매금지 된 서적을 소지하신 것입니까?

  - 예, 저의 할아버지 함동우 장군은 전두환이 보안사령관 시절에 1 군단장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12·12 당시 할아버지가 관할하는 행주대교 검문소가 1군단 관할 검문소인데 그걸 열어주지 않았으면 12·12 가 성공할 수 없었고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막지도 못하고 적극 가담도 아닌 상태로 처신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군부로부터는 비협조자로 반대편 정승화 참모총장 측으로부터는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혀 돌아가실 때 문상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생전  전두환 회고록이 나오자  바로 사셨고,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진 후에도 출판사에 반납 안 하고 보관하신 것입니다. 그걸 제가 물려받은 것입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다른 유품과 함께 관속에 넣으려 하는 것을 지역의 역사학자 배기정 옹이 역사적 가치가 있으니 땅에 묻지 말고 보관하라고 하는 말에 보관하였다고 합니다.

  - 예, 그렇군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출판사의 회수에 협조해서 반납했고 의뢰인의 부친만이 그냥 보관하셨으니 희귀본이겠습니다.

  - 예, 그렇습니다.

  - 자, 그럼 게스트 한 분 한 분이 감정위원님들께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 먼저 송시현 씨부터 한 말씀하시지요?

  - 예. 김정만 위원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전두환 회고록 초판은 몇 부가 인쇄되어 몇 부나 팔렸습니까?

  - 예, 기록에는 30만 부가 인쇄되어 팔린 것은 10만 부 정도 팔렸고, 회수를 출판사서 판매금지 후속 조치를 했는데 9만 9천9백97부는 회수되었고 3부가 미회수 처리되었습니다.

  - 그럼, 오늘 의뢰인이 가지고 온 것이 3 부 중 하나이겠습니다.

  - 예, 책의 판권을 보니 초판 맞습니다.

  - 다음은 양세돌 씨가 질문하시지요?

  - 저는 양희선 위원님께 질문드립니다. 초판본 1권에 아무런 표시가 없는 것과 글씨가 있는 것과 가격 차이는 많이 납니까?

  - 좋은 질문인데요. 글씨가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 있는 분이나 내용을 기록한 것이라면 가격은 올라가고 아무 상관없는 분의 이름이나 메모 등이 있으면 그건 낙서로 취급되어 가격이 하락합니다.

  - 그럼, 메모 내용이 신군부의 정권찬탈의 과정이 기록된 내용이면 가격이 높아지겠어요?

  - 신군부의 정권 찬탈의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이거나 역사적 가치가 들어가면 가격은 엄청 올라갑니다.

 - 자, 그럼 여기서 의뢰인께 질문드립니다. 회고록 1권에 할아버지, 아버지 아닌 다른 분의 글씨가 적혀있습니까?

  - 글씨가 아니고 ‘분서(焚書)’라는 개인일기도 아니고 소설로 보기에는 문장이 너무 투박한  문건이 책에 중간에 떨어지지 않게 테이프로 붙여진 것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겁니다.

제목이 분서갱유(焚書坑儒)에서 앞부분만 따와서 ‘분서(焚書)’로 되어있군요.         

      

   분 서(焚書)

                                           가 경 취 숙 (駕輕就熟)     

  「나는 청년시절 조국수호를 위해 군문(軍門)에 뛰어들던 때의 초심을 되새겼다.

대의를 살펴 판단했고 내 삶의 신조가 가리키는 대로 결심했고, 내가 일하던 방식대로 행동했다. 12.12다.

그 일은 나의 주저 없는 선택이었고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

                                         (출처 : 전두환 회고록 제1권, P.18)

  여기서 나는 ‘전두환’이다. 제목을 분서로 한 것은 진시황제의 분서갱유에서 따온 것이다. 처음 제목을 <솔>로 정했는데 그것 역시 <솔>하면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독극물에 의한 사살을 당하고 그의 아들 ‘김한솔’이 미지의 세상으로 안전하게 탈출했다는 뉴스 때문에 <솔>이 김 한솔을 지칭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사람도 있다. 일단 <솔>을 소개하자면 우리 부모님은 지금의 담배 인삼 공사의 전신인 전매청이다. 1979 년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서거하고 국가는 혼돈의 연속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최 대통령은 처음부터 자신은 임기를 다 채울 생각이 없다고 발표했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상당수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유신헌법이 시대에 맞지 않다고 최 대통령은 생각한 것이다.

  헌법 개정만 하고 물러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던 분이 1980년 8월 16일 돌연 사임을 하였다. 자신이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헌법을 개정하여 민주 헌법이 탄생되면 그 절차에 따라 새 대통령을 뽑고 자신은 물러나겠다고 하였는데 새 헌법을 만들기도 전에 사임을 했다.     

 9월 1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장으로 전역을 하고 역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을 선출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을 경축한다고 경축 담배를 출시했다. 이름은 ‘솔’이었다. 한글 ‘솔’ 자 좌우측으로 봉황무늬가 그려져 있다. 경축 제11대 대통령 취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하얀 담뱃갑에 빨강 바탕에 솔이 눈부시게 빛났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외웠던 국민교육 헌장의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처럼 <솔>은 전두환의 제11대 대통령 취임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그때부터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을 기록하였다. 솔이라고 작명한 사람은 문공부장관을 지낸 허문해(許文亥)였다. 물론 <솔>이 태어나기 전 12.12가 발생했기에 12.12. 사건의 이야기는 함상천과 이영구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다.

  첫머리에 전두환 회고록 1권의 18쪽에서 인용하였듯이 12.12는 부득이 전두환의 일하던 방식대로 행동하여 발생한 사건이었다.

  50대 중반인 상천과 영구는 서울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 앞의 수원식당에서 만났다.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은행나무라는 동네가 있다. 은행나무 옆 동네는 별장동네다. 왜 별장동네냐 하면 해방 후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초대 수도청장 ‘창랑 장택상’의 별장이 시흥계곡에 있었다. 그래서 별장동네라고 했는데 지금은 공원으로 변해 ‘별장터’라는 안내문만 남았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천 년은 안 되고 900년은 넘었다. 어른 둘이 손을 잡고서야 한 바퀴 돌 정도의 나무다. 은행나무는 너무 늙어 몸통만 남고 가지는 다 절단되었다. 절단된 가지에서 새순이 나와 보통의 나무와는 좀 분위기가 다르다. 아름드리 은행나무 바로 옆에 조선시대 이곳이 서울시 금천구가 아닌 경기도 시흥현 시절의 현령 중에 백성의 존경을 받은 4 명의 현감 송덕비가 있다. 맨 좌측이 김병이 현령으로 1876년 1월부터 1878년 3월까지 백성들을 청렴하게 돌봤다고 ‘청덕애민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그 우측으로 이양택, 조 동우, 방천용까지 송덕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은행나무를 중앙에 두고 오거리다. 3개의 도로는 대형버스가 다니는 길이고 2 개의 도로는 마을버스나 승용차만 다니는 도로다. 은행나무 바로 등 뒤는 카멜리아 24시 사우나가 있고 길 건너 24시 SS 마트가 있고 횡단보도를 건너면 수원식당이 나온다. 수원식당 건물에는 큰 도로 쪽으로 맥도널드 햄버거, 온 누리 약국, 쌀 통닭집이 자리 잡고 있다.

  “영구야! 여기야 여기!”

  “상천아 반갑다!”

  “사장님, 여기 도가니탕 2개와 소주 한 병 주세요.”

  “파랭이?”

  “에이 사장님, 상천이가 파랭이 먹는 거 봤어! 빨갱이로!”

  “빨강이 없네~ 파랑뿐인데.”

  “그럼 우리 손님이 다른 식당에 가라고?”

  “아니야, 바로 사 오지.”

  “이거 전두환이 회고록 내더니 수원식당까지 술을 파랭이만 팔고 빨갱이는 안 파는 거야?”

  “아니, 이 사장 왜 그래. 금방 사 올 테니 잠깐 기다려.”

  “빨리 사 오소!”

  영구와 상천은 담배 <솔>이 태어나기 전해인 1979년 12월 12일 고 3이었다. 영구는 흑석동의 ‘검은 돌 고등학교’ 3 학년, 상천은 시흥동은 ‘은행잎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고등학교가 서로 다른데 영구와 상천이 친구가 된 것은 시흥동의 폭력조직 ‘산 이슬파’의 조직원이었다. 산 이슬파 조직의 두목은 오 성경이었다. 성경은 80년대 삼청교육대에 잡혀가서 교육 중에 탈출을 시도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조직의 우두머리가 사라지자 중간 보스들이 모두 잘났다고 다투다가 조직이 모두 와해되었다. 영구와 상천이도 성경이 삼청교육대 입소 무렵 부대는 다르지만 삼청교육대 입소를 했다.

  성경은 강원도 화천 다목리 부대로 삼청교육 입소하고, 영구와 상천은 소사 33 사라고 하던 지금의 17 사단으로 입소했다. 그 소식을 들은 상천의 아버지 함동우 장군이 수도권의 군단장으로 근무하고 있어 상천이만 뺄 수 없어 영구를 함께 빼준 것이다.

  함 장군은 12.12에 적극 가담한 것도 아니지만 노태우 9 사단장의 예하부대 1 개 연대병력이 행주대교와 삼송리를 통과할 때 벽제 군단 지휘소에서 검문소를 개방 못하게 하고 9 사단 병력을 되돌릴 수 있었는데, 이군끼리 충돌이 우려되어 충돌 없이 하느라 검문소 통과를 묵인했던 것이다. 함 장군이 이미 12.12 주동세력이 성공할 것 같으니 기회주의자로 전 두환 보안사령관 편을 들었다고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추종한 장군들로부터 외면을 당해 괴로워했다.

  반대로 전 두환 보안사령관 측에서는 함 장군이 검문소에서 시간을 끌게 만들어 하마터면 쭉 쒀서 개에게 줄 뻔했다고 함 장군을 12.12가 지나서 한직으로 보냈다.

함 장군은 최규하 대통령이나 한미연합사령관의 명령도 없이 부대를 이동하는 것이 불법이라고 생각해서 최초 행주대교 검문소에서 부대 이동 근거 명령을 보고하라고 한 것이 시간을 지연시킨 빌미를 준 것이다.

  노태우의 9 사단의 1 개 연대병력이 경복궁 30 단의 외곽을 둘러싸자 이미 12.12 사건은 경복궁의 보안사령관 측으로 기울어졌다. 함 장군에게는 12.12 사건이 마음에 탐탁하진 못했지만 더 큰 피를 흘리지 않고 이 정도에서 정리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전역을 해서 태안 고향에 가서 낚시나 하고 회고록이나 쓰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역신청서는 처리가 안 되고 강원도 1 군사령부 부사령관이 되었다. 초등학교부터 고 3까지 부반장은 거의 있으나마나 존재처럼 부군사령관도 거의 사령관 휴가 갈 때 직무대리 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함 장군의 아들 상천은 아버지가 장군이라는 것을 시흥사거리에서 숨기고 살았다. 삼청교육대 잡혀가기 전에는 시흥사거리에서 아무도 장군의 아들인 줄 몰랐었다.

  시흥사거리 ‘산 이슬파’가 20여 명이 삼청교육대 동부전선 서부전선 나누어 갔는데, 어느 날 상천과 영구 둘만 시흥사거리에 나타났다. 그 무시무시한 삼청교육대에서 누구의 힘으로 나왔느냐? 고  동네 어른들이 물으면 몰라요. 아니면 외할아버지 최 재석이 힘써주신 모양이에요.라고 대충 둘러댔다.

발 없는 말 천리 간다고 상천이 아버지 함 장군이 부천 소사 중학교 역사교사 최성현과 눈이 맞아 결혼식도 안 올리고 동거를 하다 태어난 것이 상천이다.

  함 장군의 고향은 충청남도 태안이었다. 함 장군의 아버지 함재석 옹은 일본제국 시대 만주의 독립운동을 하던 김 구 선생과 김좌진 장군에게 태안 일대의 농지를 처분하여 군자금으로 만들어 은밀하게 전달했다. 동우는 만주에서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다. 만주의 생활은 가난했다. 하지만 함재석이 한학에 밝아 틈틈이 아버지에게 배운 한문 실력과 일본어 공부도 했다. 친일을 하려고 일본어를 배운 것이 아니라 일본을 이기기 위해 일본어 공부도 했다.

  만주 군관학교 입학하던 해에 일본이 패망하고 귀국 직전에 함재석 옹은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고국으로 돌아온 동우는 태안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고 국군에 입대하였다. 육군사관학교 6 기로 임관했다.

  박정희를 저격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태안에서 함 장군 하면 다 알아주는 상태였는데 아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자식을 키우다 보니 동우는 전후방 각지를 혼자 다니면서 근무를 했다.

 서울 근교 안양 수도군단에 근무할 때 시흥사거리에 사는 소사중학교 역사교사 최 성현을 알게 되었다. 함동우 장군과 최송선 사이에 태어난 것이 상천이다. 일부일처제의 나라에서 혼외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호적은 태안의 본처인 차 씨 부인의 막내아들로 등재했다.

  “사장님, 소주 빨갱이를 만들어 오는 거요?”

  “아니, 항상 소주가 파랭이가 부족하고 빨갱이가 남아도는 데 오늘은 은행마트에도 빨갱이가 부족하네!”

  “사장님 은행마트에서 사다가 손님에게 삼천 원 받고 팔면 불법아녀?”

  “에이 장군의 아들이 왜 그래?”

  “장군은 뭔 썩어빠진 장군이야, 아버지는 국립 대전 현충원 가기 싫다는데 억지로 동네 이장, 면장, 군수 국회의원 놈들이 강제로 현충원에 안장시켜 지금도 맘이 불편하실 건데.”

  “상천아,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네 아버님이 삼청교육대 빼줘서 감사드린다고 해야 하는데.”

  “돌아오는 현충일에 우리 아버지 묘소 참배 같이 할래?”

  “그래.”

  “야, 그건 그렇고 요새 뉴스 보다가 생각한 건데, 최순실이 모습이 꼭 네 어머니 최성현 선생님 꼭 닮았더라.”

  “그래, 나도 하도 신기해서 어머니에게 물으니까 최태민이 일제강점기 평안도에서 친일 순사한 것을 숨기려고 호적을 세탁한 모양이라고 하셔. 외할아버지가 최재석인데, 그 윗대가 계속 올라가면 최태민 이름도 나온다는 거야.”

  “하긴 해방 이후 북한은 김일성이 친일 행위자 처단을 하였고, 남한은 이승만이 친일 경찰을 그대로 고위층에 채용했으니 북한에서 친일 행위자가 목숨 걸고 내려왔겠지.”

  “그 당시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이북 5 도민회에 가서 아는 분들 증인만 세우면 주민등록, 학교 졸업증서 다 만들 수 있었다더라.”

  매일 9 시 뉴스 땡! 과 동시에 TV 화면에 등장하는 전 두환 대통령이 상천은 너무 보기 싫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을 갈 것도 아니고 삼청교육대에 붙잡혀 갔다가 아버지 함 동우 장군의 인맥으로 나오긴 했어도 시흥 사거리서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건설일용직 근로자로 나섰다. 처음에는 일당 잡부를 하다가 김영종 목수 팀장의 눈에 들어 목수의 길을 가게 되었다.

  1980 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30 년간을 목수를 했다. 전국 어디든지 건설현장에 목수팀장이 가자고 하면 다 따라다녔다.

  2016년 5 월 17 일 강원도 화천에서 뉴 칠성아파트 신축공사장에서 발판이 결속체결이 똑바로 안 되어 한쪽만 묶고 한쪽은 풀려 발판이 뒤집어지면서 지상 2층에서 지하 3 층으로 떨어졌다.

  3 명이 떨어졌는데 한 명은 철근에 안전벨트가 걸려 구사일생으로 살았고 한 명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상천은 발목뼈가 부서졌다. 화천의 삼성병원에서도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긴급 환자호송 차량을 타고 시흥대로 독산동 새나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눈부신 금천 병원서 수술을 하고 다음 수술 환자를 위해 병실을 이동하라고 해서 고려골든 병원 107호에 이송되었다.

 영구 역시 건설일용직 근로자로 해체를 하다가  2016 년 8 월 19 일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주상복합건물 신축공사장에서 대퇴부 골절로 시화병원서 수술을 하고 5주의 병원치료 후에 역시 병실을 비워주기 위해 이송하여 고려고등 병원으로 왔다.

  처음에는 다친 다리가 부끄럽고 살아갈 길이 막막해 자살을 생각했었다. 고려 고등 병원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상천과 영구가 재회를 했다. 인생 마지막 학교 고려고든 정형외과에서 만난 것이다.

  영구는 103 호 상천은 107 호였다. 병원에서 산재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나를 찾아가는 시간>에서 근로복지 공단의 김 필원 강사가 환자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어 친해졌다. 병원치료가 끝나고 통원으로 물리치료를 하게 되었다. 수원식당에서 고려고든병원 환자 친목회를 하였다.

  상천 어머니는 소사중학교 역사교사였다. 상천 아버지 함동우 장군이 1983 년 돌아가시고 하도 답답하여 교사라는 직업에 맞지 않게 김포공항 근처의 청명 철학관에 가서 청명거사에게 신수를 봤다.

  청명거사는 최성현의 이룰 성(成) 자가 여자 이름에 쓰면 일찍 과부가 된다고 말했다.

성현은 아들 상천의 생년월일시를 내밀었다.

  ‘이름 함상천, 전생에 호랑이던 놈이 이생에 금계로 태어났구나.

  처음에는 고난이 있고 뒤에 길함이 있다.

  고향 땅은 이롭지 못하니 고향을 떠나 대처로 가면 대성하겠다.

  부모 형제, 처자의 덕은 없다.

  평생 고독하게 살아갈 팔자다.

  한번 부르면 백가지로 대답하고 가는 곳마다 횡재와 복이 있다.

  초년의 운세는 머리만 있고 꼬리가 없다. 천권성이 들었으니 어렸을 때는 분주하리라.

  권위가 사방에 있으니 가히 천 사람을 사귀게 된다.

  학문을 부지런히 배우면 관록을 얻게 되리라.

  천성이 맑고 활달하니 스스로 따르는 사람이 많다.

  성품에 고집이 많으니 친한 사람이 자연히 멀어진다.

  동쪽으로 가나 서쪽으로 가나 바람과 서리가 거듭되리라.

  천지간에 정이 있으니 자수성가하리라.

  함 동우 장군과 정식 결혼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야합으로 태어난 자식이라 태안의 본처의 자식 함상윤, 상혁 다음으로 셋째 아들로 상천을 입적을 하였다.

  아버지 고향 태안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서울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에 터전을 잡고 지내는 것을 보면 사주팔자가 아주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사주에 사(巳)가 있으면 치아가 고르지 못하다고 했다. 어머니 치아가 덧니가 많아 상천이 치아도 못난이 옥수수 같았다.

 함 동우 장군을 닮아 외모는 튼실했다. 사주에 역마살이 있어 전국을 돌아다닌다더니 정말로 공사현장 따라 부산, 대전, 대구, 청주, 전주, 익산, 영월, 화천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목수를 했다. 강원도 철원에서 군부대 공사를 하는 중에 상천은 아버지 함 동우 장군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병명은 간경화라고 했다. 태안 본가에 도착하니 큰형 상윤과 작은 형 상혁은 이미 삼베옷 상복을 입고 곡을 하고 문상객을 맞고 있었다. 시골집 마당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맨 앞에 서 있고, 태안 군수, 지역 국회의원, 새마을지도자회, 지역 경찰서 등에서 조화를 보내왔다.

  늦게 참석한 상천은 재빠르게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태안에는 강릉 함 씨의 문중 산이 있었다. 아버지는 큰 형과 작은 형에게 죽으면 국립묘지로 가지 말고 선산에 묻어달라고 했다. 비석도 세우지 마라고 했다. 작은 형 상원이가 아버지 청춘을 바쳐 군인의 길을 가셨고 장군이 되셨는데, 국립묘지 안장이 가문의 영광 아니냐? 고 물으니 아버지는 그래 장군이면 가문의 영광이 맞지만 나는 선배 장군들 뵐 면목이 없으니 현충원 말고 함 씨 문중 산에 비석도 세우지 말고 묻어 달라고 했다.

  이유는 아버지가 12.12 사건 때 행주대교와 삼송리 검문소 두 곳 중 하나만이라도 똑바로 통제했으면 12.12가 전 두환 보안사령관 맘대로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고 나중에 최규하 대통령 하야까지 불러오는 불충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국립묘지 들어가면 선배 장군님들 뵐 면목이 없다고 했다.

  아울러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것을 하극상이라고 말하지만 박정희의 추한 말년을 미리 총성 한방으로 ‘연민의 서거한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재규가 시해했으니 그 정도로 끝이 났지 시해 안 하고 1980 년 5월의 봄을 맞이했다면 4.19 보다 더 심한 데모로 이승만의 하야보다 더 치욕적인 하야를 했을 텐데 김재규가 자기도 죽고 대통령도 죽어 더 추해지기 전에 그 정도 선에서 독재는 했지만 산업화와 새마을 운동만은 역사에 남게 하려고 저지른 것으로 생각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더 모아 할 일을 혼자서 도모하다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물론 이 말은 장례식이 다 끝난 다음에 상윤, 상혁에게 들어 상천은 알게 되었다.

함 장군은 돌아가시기 전에 술만 마시면 괴로워했다. 정권찬탈을 막지 못했는데 죽어 선배 장군들을 무슨 면목으로 보겠는가? 보안사령관 별 둘의 전두환이 별 넷 정 승화를 어떻게 체포하고 짜인 각본에 따라 최규하 대통령 하야와 통일주체국민회의 소집하여 체육관 선거로 청와대로 입성하는 일련의 과정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듯해도 손 한번 쓰지 못하고 소극적 동조자가 된 것이다.

  1980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했다.

최 대통령은 하야 발표를 하고 다음 날 청와대에서 서교동 자택으로 이사를 했다.

8월 27일 소집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전두환 예비역 대장을 추대했다.

  9월 1일 제11 대 전 두환 대통령 취임을 기념하여 경축 담배 <솔>이 출시되었다. 태극기 앞에서 전두환은 국헌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국민의 자유와 복리 증진에 노력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한다고 선서를 했다.

 <솔>도 그 광경을 지켜봤다.

우리나라 담배 중에서 최고의 질이 좋고 베스트셀러 담배가 되었다.

  일반 사회에서는 <솔>로 팔려나가지만 특수하게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고 난 후에 북한의 김신조를 파견한 124 군부대에 대항하는 설악산 부대를 만들었다. 일명 그린베레 부대라고 불리는 ‘설악 동지회’ 요원들에게 <솔>은 솔이라는 이름이 삭제된 백색 담배에 민무늬로 제공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1980년대 구석구석을 다 볼 수 있었다. 삼청교육대 구경도 했다.

  <솔>은 제12. 13 대 대통령 이. 취임식도 목격했다. 여의도 광장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단임제를 실천하고 떠나는 전 두환 대통령과 1987년 역사적인 직접 투표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의 아름다운 광경을 봤다. 신구 대통령을 보기 위해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행사장은 인산인해였다. 거리마다 현수막과 입간판이 설치되었다.

 ‘단임 실천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전두환 각하 내외분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등의 현수막과 피켓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 이승만 대통령은 4.19 데모로 청와대(당시 경무대)에서 쫓겨나 해외 망명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 집권에 성공했으나 임기 말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총탄에 맞아 비명에 갔다. 장면, 윤보선 대통령 시기는 데모로 해가 떠서 데모로 해가 지는 날의 연속이었다.

어수선한 난국에서 5.16 혁명인지 쿠데타인지 불분명한 상황으로 하야 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최규하 대통령은 자의 반 타의 반 하야를 했다. 주어진 임기를 꽉 채우고 내 발로 청와대를 걸어 나가는 최초의 대통령이 전 두환대통령이다.

   시인 미 당(未堂) 서정주는 전두환 대통령을 단군 이래 최고의 통치자라는 칭송 시를 쓰기도 했다.        

  

    전 두환 대통령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未 堂  서 정 주-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도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 하신아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 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임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으니     

  (이하생략)     

정말 세계에 보기 드문 칭송의 시다.

이 시만 본다면 시흥사거리 은행나무 옆에 나란히 서있는 4 명의 ‘창덕애민 선정비’ 주인공 시흥현감 보다 더 위대한 선정을 베푼 것으로 후세 사람들이 생각할 것이다.

  이 무렵 시인 서정주의 호 ‘미 당(未堂)’을 영부인이 ‘말 당(末堂)’으로 잘못 읽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여의도 모 방송국 코미디 프로에 ‘말 당 학교(末堂學校)’가 치솟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폐지되는 사건이 있었다.

  1988 년 2 월 25 일이 역사적인 날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평화적으로 대통령을 이임과 취임이 한자리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의도에는 KBS, MBC, SBS, 연합통신, 내외통신, AP, UPI 등 세계적인 언론이 모두 모였다.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국민의례가 거행되고 대통령 선서, 축하노래, 이임사, 취임사로 이어졌다. 이임 대통령의 리무진이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리무진은 연희동을 경유하여 백담사로 향했다. 이임한 전 두환 대통령 내외는 7 년 동안 단임 대통령 기간 휴식이 없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퇴임하면서 바로 백담사에 가서 휴식을 취하기로 약속이 되었다.

  백담사 주지였던 일해 스님이 과거 전 두환 대통령이 1 사단장 시절에 군대의 법당이던 불이사(不二寺)의 법사로 봉직했다. 그 인연으로 전두환 장군은 머리가 복잡하고 문제가 해결 안 되는 일이 있으면 일해 스님을 찾아가 환담을 했다. 그때마다 스님은 아주 시원한 샘물 같은 지혜를 주셨다. 아니 전두환 장군의 내면의 이미 간직했던 총기를 밖으로 분출시켰다. 제1사단장을 마치고 국군 보안사령관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으로 추천한 사람은 노 재현 국방부 장관이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문홍구 수도군단장을 차지철 경호실장은 이재전 장군을 보안사령관으로 추천하려 했다. 노 재현 국방장관은 전 두환 장군이 1 사단장으로 근무하면서 제3 땅굴 발견한 공로와 평소 박 정희 대통령이 전 두환 장군에 대한 신임이 두터워 추천한 것이다.

  보안사령관으로 업무파악을 하고 열심히 대통령에게 보고다운 보고를 하려고 준비하는 시점에 김재규 정보부장이 박 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10.26 사건이 터진 것이다.

김재규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의 친분이 깊어 사실상 조사를 해야 하나 최규하 대통령은 국방장관의 배석 하에 결재를 하겠다고 하고 국방장관의 행방은 국방부에 없고 난감한 상태가 되었다. 순간 1 사단장 시절 일해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은 높으나 하늘 아래 있고, 물은 아래로 흐르나 바다 위에 있구나!’라는 말을 되새기자 보안사령관은 내면의 총기가 일어났다.

밀어붙이자. 여기서 멈추면 죽음이다. 12.12 육군 참모총장 체포 작전은 강행되었다.

 1979년의 10.26 사건은 어찌 보면 예견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김재규 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 경쟁은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걸어 다니는 인간 폭탄 간의 경쟁이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과 경호실장의 갈등은 국정농단 그 자체였다. 사실상 차지철 경호실장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김재규 정보부장은 차지철을 제거하고 국정농단을 혁파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거사를 하면 군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태안 함 동우 장군의 빈소에 장군의 관을 병풍으로 가리고 상윤, 상철, 상천 3 형제는 삼베옷을 입고 곡을 하였다. 청와대 비서실장이 전두환 대통령이 보낸 조화와 조의금을 부의함에 넣고 분향을 했다. 함 씨 형제들과 비서실장이 맞절을 했다.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각하께서 직접 오지 못한 것을 유감이라고 하셨습니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각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런 시골까지 조화를 보내주시고 감사의 말씀 꼭 전해주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지는 국립묘지로 하실 거죠?”

  “아닙니다. 아버님이 그냥 강릉에 있는 함 씨 문중 산에 묻어달라고 하셔서......”

  “아, 예.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이 서울로 올라가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각하, 함 동우 장군 빈소에 다녀왔습니다.”

  “먼 길 다녀오느라 수고했소!”

  “예, 그런데.”

  “뭔 문제가 있소?”

  “함 장군 묘소가 현충원이 아니고 함 씨 문중 산이라고 합니다.”

  “뭐야?”

  “장군으로 예편한 분이 함 씨 가문에도 영광인 국립묘지로 모셔야 하지 않겠느냐 말했더니 망자의 유언이 국립묘지 대신 선산을 택하였다고 들었습니다.”

  “함 장군, 이 늙은이가 죽어서도 천하의 전두환을 애 먹이네? 12.12 때 화끈하게 검문소 열어주면 조기에 해결될 것을 부대이동 명령 근거가 대통령 명령이냐 한미연합사 승인은  받았느냐 따지더니, 죽어서도 애를 먹이네! 나 참나 원~~”

  “어떻게 할까요?”

  “당장 지역구 국회의원과 태안군수, 지역 유지, ‘성우회(星友會)’를 다 동원해서 무조건 현충원에 안장시켜!”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비서실장은 먼저 민주정의당 지역구 이 혁원 국회의원에게 전화를 했다.

  “예, 국회의원 이혁원입니다.”

  “의원님, 잘 지내셨습니까? 비서실장입니다.”

  “각하께서도 잘 지내시지?”

  “예, 의원님 덕분에 잘 지내시지요, 그런데, 의원님이 좀 해결하실 일이 생겼습니다.”

  “아니, 비서실장이 나에게 부탁을?”

  “아닙니다. 제 부탁이 아니라 각하의 부탁이십니다.”

  “말해봐?”

  “태안의 함 동우 장군님 부고받으셨죠?”

  “그럼, 난 비서관 통해 조화랑 조의금 다 보냈는데.”

  “조화 조의금 문제가 아니라 함 장군 자제들이 망자의 뜻이라고 대전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하고 강릉 함 씨 문중 선산에 모신다고 합니다. 각하께서 이 의원님이 좀 내려가서 국립묘지에 안장하게 힘써 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망자의 뜻이 문중 산이라면 그대로 하고 발표 사실대로 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의원님 12. 12 아시죠?”

  “알지!”

  “그때 9사단 병력이 행주대교 검문소와 삼송리 검문소에서 지체하여 얼마나 애태웠습니까? 아차 하면 실패로 될 걸 간신히 병력이동을 경복궁으로 오게 되었는데 함 장군을 국립묘지에 안장 안 하면 유언비어가 나돌 것 아닙니까?”

  “뭔 유언비어?”

  “각하가 국립묘지 안장 막았다고.”

  “그건 안 되지, 내가 태안으로 내려가지.”

  “고맙습니다. 의원님!”

 이 혁원 의원은 바로 태안 함 동우 장군의 빈소로 갔다. 국회의원이 내려오자 태안 군수, 읍장, 이장까지 다 따라왔다. 태안군수,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태안읍장, 심지어 이장까지 총동원하여함 종우 장군을 대전 현충원에 안장시켰다.

  이혁원 의원은 함동우 장군이 방패 사단장 시절 사단 법무참모였다. 군대 법무관으로 15년 근무를 마치고 전역해서 태안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민주정의당 창당 작업에 가담하여 이곳의 지역구 후보가 되고 당선이 된 초선 의원이었다.

  “상천아, 왜 전 두환 대통령은 아버지를 꼭 국립묘지로 보냈을까?”

  “영구야, 생각해 봐. 현충원에 안 가고 태안 선산에 묻히면 12.12에 적극 가담하자 않았다고 전두환 대통령이 국립묘지 안장을 반대했다고 소문이 돌게 되면 대통령 입장이 나쁘겠지?”

  “하긴 그 당시 5공 때는 9시 땡! 뉴스시간에 매일 나오는 전 두환 얼굴 보기 싫다고 TV채널을 돌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돌아가신 장군을 현충원에도 안 보냈다고 하면 빅 뉴스거리지.”

  “정말로 아버님이 국립묘지로 안장을 하지 말고 선산에 묻어달라고 했으면 지금이라도 유골 네가 이장시키면 안 되니?”

  “에이, 이미 세월이 흘러 뼈도 다 썩었을 텐데, 이제와 이장이 무슨 의미가 있어.

또, 나는 적자가 아니고 서자고 장손이 아니라서 그런 권한도 없지.

그런데, 지금도 난 큰형이나 작은 형이 왜 아버지 유언이 그러면 그렇게 하지 군수, 국회의원이 그런 말을 한다고 대전 현충원에 모셨는지 이해가 안 가.”

  “그럼, 그때 네가 형들에게 말하지?”

  “에이 난 발언권 없어. 두 형은 아버지 본처의 자식들이고 난 솔직히 첩의 자식 아니냐?”

  “야, 요즘 본처, 첩의 자식이 어디 있어. 호적에 등재되면 동일한 대우지?”

  “그건 영구 네가 나를 친구로 좋게 말해주는 거고 태안 가면 나는 첩의 자식이라 집안 친척들에게 인정도 못 받아.”

  “너의 생모는 지금 뭐 하셔?”

  “응, 부천 소사 중학교 역사 선생님으로 정년퇴직 후에 그냥 교원 연금으로 살아가시지.”

  “그럼, 어머니는 아버지 묘소에 참배는 하니?”

  “현충일, 추석, 설날, 기일 등은 태안의 본가 식구들이 참배하니까 그 며칠 전에 다녀오거나 그 후에 다녀오시지.”

  “어머님에게 들은 아버님에 대한 숨은 이야기 없어?”

  “모르는 사람들은 아버지가 장군이 된 후에 우리 엄마 만난 줄 아는데, 그건 말이 안 되지 내가 나이 55 세인데 말이 안 되잖아?”

  “그럼, 아버님 하고 어머니는 언제 만났어?”

  “아버지가 소령 시절 안양에 군부대에 근무했는데, 우리 외가가 안양 비산동에 있는데 그 집에서 전세로 혼자 살고 있었는데, 매번 회식만 하면 부대장이 부부동반으로 해서 태안에서 어른 모시고 농사로 바쁜 부인을 데려올 수 없어서 부부는 아니지만 주인집 따님을 한 번만 참석해 달라고 부탁해 어머니를 참석시켰다는 거야. 그렇게 한번 두 번 회식을 참석하다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눈이 맞아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이지.”

  “야, 정말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수준이네.”

  최성현은 소사 중학교 역사 교사를 하면서 함 소령이 부대 회식을 할 때마다 배우자로 참석을 했다. 부대에서는 함 소령 사모님이 최고 엘리트 사모님으로 소문났다.

함 소령이 중령으로 진급해서는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대대리에 있는 불곰부대 대대장이 되었다. 그곳 관사에까지 최 성현은 김치를 주기적으로 담아 냉장고에 채워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대장 관사에 가서 간성고등학교에 다니는 연대장 아들과 간성 중학교 다니는 딸을 공부도 가르쳤다. 사회 과목은 물론 국어와 영어도 개인교습을 했다. 함 중령의 차후 진급을 위한 로비였다.

  “그래, 솔직히 우리 엄마 최성현 여사는 억울한 인생이야. 여자로 면사포 한번 못써보고 그늘에서 살았으니.”

  “어머님은 아버지를 정말로 사랑한 모양이네. 결혼식 올린 사이도 아닌데, 아들을 낳았으니까.”

  “엄마 말이 처음에는 나를 산부인과에 가서 낙태시키려고 갔는데, 병원에서 갓 태어난 아기들을 보니 차마 지울 수가 없어 되돌아와 그냥 학교에 출산 휴가를 내고 나를 낳았다는 거야. 학교 선생님이 결혼식도 안 올리고 출산휴가를 가니 얼마나 학교 다른 선생이나 학생들이 놀랐겠어?”

  “완전 학교 특급 뉴스 되었겠다.”

  “그런 셈이지.”

  “어머니가 역사 선생님으로 은퇴했는데, 최근에는 너에게 한 말씀 있어?”

  “식목일에 만났었는데, 어머니 말씀이 이놈의 나라 박 대통령 탄핵이 문제가 아니라 5공 6공 청산을 똑바로 안 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니 전두환이 회고록을 쓰고 있다고 한탄하시더라.

  5공 청문회 똑바로 했다면 감히 전두환이 지 잘 났다고 회고록을 쓰겠어? 어머니 말이 전두환은 회고록을 쓸 것이 아니라 참회록을 써야 한다고 펄펄 뛰시더라. 이건 어머니가 다 읽어봤는데 전두환 회고록이 아니라 망언록(妄言錄)이라고.”  

  “야, 나도 신문에서 봤는데 전두환 회고록 광주에서는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더라.”

  “5.18 재단에서 전 두환 회고록을 수거해 재단 앞마당에 쌓아 놓고 불사르는 장면이 뉴스에 나왔어.”

  “그래, 어머니 말씀처럼 쓰려면 참회록을 써야지 뭐 잘했다고 회고록이야?”

  “상천아, 담배 한 대 주라.”

  “여기 있다. 아주 귀한 담배다.”

  “어, 추억의 솔이네?”

  “그래 80 년대 추억의 솔이지?”

  “이거 단종 담배를 어디서 구했냐?”

  “응, 지난주에 태안에 큰 형님이 쓰러지셔서 내려갔었지. 큰 형님도 많이 늙고 형수님은 더 늙으셨더라.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아버님 책장 정리 좀 하라고 형수님이 그러셔서 책장 정리했는데, 책장 구석에 <솔> 2 갑이 숨겨져 있더군. 아버지의 비망록도 한 권 발견했다.”

  “야, 이 <솔>은 알고 있겠지. 12. 12의 진실을.”

  “그럼, 이 솔 담배꽁초는 전두환과 그 일당들이 광주 민주화 운동을 어떻게 진압했고,  누가 발표 명령을 내렸는지, 전 두환 회고록에 광주 발포 명령 왜 거짓말하느냐고?”

그렇다. 함 장군의 서재에서 발견한 <솔> 한 갑은 1980년을 전후하여 장군이 왜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하고 함 씨 문중선산에 비석도 세우리마라고 한 이유를 알고 있다.

  함 장군이 군단장으로 별 둘 사단장이 병력 이동하는 것을 국군통수권자 최규하 대통령이나 작전권 쥐고 있는 한미연합사령관의 승인을 득한 병력 이동이 아니면 군단장 계급장이 떼이는 한이 있어도 행주대교 검문소와 삼송리 검문소를 막았어야 했는데 스스로 그걸 막지 못한 죄책감에 전역 후 술로 세월을 보내다 화병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솔직히 정승화 대장과 전두환 소장 두 세력의 어느 쪽으로 힘이 기우나 눈치를 보느라 12.12 적극 가담도 아니고 혁혁한 저지의 공도 얻지 못한 무기력한 상태로 12.12 그날을 보낸 것에 대한 때늦은 장군의 후회였을 것이다.

  전두환 회고록의 전두환은 자신이 일하던 방식대로 행동했고 12.12는 확실한 하극상(下 克上)이었다. 세월이 지나 2017 년에 전두환 회고록이 발간되었다.

2017년은 특이한 해였다.

박 근혜 대통령이 정상적인 임무 수행을 못하고 2016 년 가을의 ‘촛불시위’ ‘촛불혁명’으로 명명되는 전국적인 시미들의 무혈시위에 의해 물러나고 문재인(文再寅) 대통령이 조기대선에 당선되었다. 문 대통령이 취임하기 직전에 전두환 회고록이 출간되었다. 광주에서는 광주시민들이 회고록 1 권이 사실과 어긋나는 내용이 많고 광주시민을 북한 간첩의 조종을 받아 폭도가 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법원에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올렸다. 광주지방법원은 시민들의 소승을 이유 있다고 판결하여 판매 금지가 되었고 이에 불복한 전두환 측이 상급법원에 항소하였다. 역시 고등법원 대법원 모두 1권에 대해서는 판매금지가 정당하다고 판결이 내렸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 사업회 앞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인 전두환 회고록에 기념사업회장이 휘발유를 뿌렸다. 이어 사무총장이 성냥불을 붙였다. 전두환 회고록은 순식간에 황덕불이 되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환)’ 이후의 최대 분서(焚書) 장면이 연출되었다.

 사회자 윤 인구 아나운서가 출연자를 향해 말했다.

  “분서까지 보셨는데 그럼 출연자 세분은 예상가격을 써주세요. 그리고 의뢰인도 의뢰인의 희망가격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다 쓰신 분은 판을 앞에 놓으시고 정면을 보세요.”

  “자 봅시다. 송시현 씨 500 만원, 양세돌 씨 1억 원, 임 선중 씨 5 천만 원입니다. 좋습니다. 전문위원님들의 감정가 봅니다. 감정가 기록 눌러주세요. 올라갑니다.”

  “잠깐! 의뢰인은 얼마를 쓰셨습니까?”

  의뢰인은 수학에서 무한의 수를 표시하는 기호(∞)를 그렸다.

  “의뢰인은 무한 표시를 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 그런 표시를 했습니까?”

  “예, 이 자리에 가지고 나왔지만 할아버지의 유품을 어떻게 금전으로 바꾸겠습니까? 저도 제 아들에게 물려주고 후손들이 누구도 팔지 말라는 뜻에서 무한 표시를 했습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최종 감정가 올라갑니다. 단, 시, 백, 천, 만, 십만, 100 만, 천만 2천, 3천, 5 천, 7천, 8천 만 8천5백만 원 최종가격입니다.”

 “가장 근사치 1 억을 쓰신 양 세돌 씨에게 인형 2 개 드리겠습니다.”

  “잠시 김정만 전문위원님 말씀 들어보겠습니다.”

  “예. 우선 판매금지가 된 도서, 광주민주화 운동기념 사업회 마당에서 분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출판사에서 회수를 해서 소각을 했는데 책의 상태가 양호하게 지금까지 보존된 것에 가격을 높게 쳤습니다. 또한 책 속의 분서라는 작은 글에서 전두환 대통령 취임 경축 담배가 <솔>이었고 <솔>이라고 명명한 사람까지 나온다는 것은 엄청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원래 1,2,3 권이 세트로 모였으면 1억인데, 2,3 권이 없어서 하나에 천만 씩 감해서 8 천만 원에 책 속의 또 다른 문건 테이프로 부착된 작은 단편이야기가 500 만 원 더해서 최종 8천5 백만 원이 되었습니다.”

  의뢰인이 손을 들었다.

  “의뢰인 무슨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예, 여기 전두환 회고록 속의 부착물 ‘분서(焚書)’ 제목 밑에 ‘가경취숙’이라는 글쓴이 이름이 나오는데 ‘가경취숙’은 누구입니까?”

  “예, 아마도 ‘가경취숙’은 함 장군 자신이 자신의 이름으로 썼다가는 전두환 정권하에서 어떠한 화를 당할지 모르니까 중국의 고사에 나오는 잘 달리는 말에 비유한 거 아닐까요?”

  양희선 위원이 손을 들어 발언을 했다.

  “저는 다른 생각입니다. 최성현이라는 함 장군의 혼외 부인이 자기 이름 숨기고 ‘가경취숙’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써서 함 장군에게 주었고 함 장군은 후세 사람들이 전두환 회고록만 읽지 말고 이 분서(焚書)도 함께 읽어 역사를 바로 알게 한 거 아닐까요?”

 “예, 벌써 시간이 다 되었군요.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TV 감정 쇼! 진품명품 >5.18 광주민주화 운동 50 주년 기념 특집을 마치겠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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