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쟁이, 흔하다. 잘나가는 대형 로펌 변호사, 대학 병원 의사부터 조그마한 중소기업 막내 직원까지, 모두 다 월급쟁이다. '사장님'이나 '프리랜서'가 아닌 이상, 특정 조직에 소속되어 임금을 받는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 월급쟁이다. 따지고 보면 삼성전자 사장님도 월급쟁이다.
블라인드라는 앱이 있다. 직장인들의 익명 커뮤니티인데, 종종 직장을 둘러싼 대결이 일어난다. 연봉, 워라벨, 서울 근무 등 수많은 요소를 가지고 기싸움한다. 글래디에이터의 검투사처럼, 날카로워 보이는 모든걸 다 휘두른다. 그런걸 볼 때마다, 뭔가 짠하다. 어차피 우리 모두 다 피고용인 입장인데 뭐 저렇게...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월급이 얼마 정도 되어야 '돈 좀 번다'라고 할 수 있는지. 돈을 얼마나 모아야 '돈 좀 모았다'고 할 수 있는지. 심심하기도 해서 좀 찾아봤다.
1. 연봉으로 줄세워보자
고용노동부의 발표를 토대로 2018년도 임금 근로자의 연봉을 분석한 한국경제연구원의 조사자료다. 연봉을 기준으로 상위 10%부터 차근차근 줄세워보자. 세전 연봉을 기준으로 한다.
아래 표는 각 구간의 커트라인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상위 10%는 6,950만원, 상위 20%는 5,062만원이 각각 커트라인이다. 대학생 커뮤니티에서는 연봉 4,000만원을 굉장히 박봉으로 보는데, 실제로 그 연봉을 받는 사람은 상위 30% 구간에 있다. 딱 중간에 있는 사람의 연봉이 2,800만원이다. 돈 버는거, 그거 쉬운거 아니다.
한국경제연구원 - 임금근로자소득분위별 연봉 분석('19) 재구성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에 따르면 정규직 평균연봉은 대기업은 6,500만원, 중소기업은 3,700만원이다. 왜 청년들이 대기업 취업을 그토록 희망하는지 알 수 있다. 대기업에 들어가면 상위 10~20%를 노려볼 수 있다.
연봉 1억원은 꽤나 묵직한 느낌을 준다. 한번 살펴봤더니, 전체 근로자의 3% 정도 된다. 숫자로 따지면 49만명이다. 참고로 전체 임금 근로자는 1,544만명이다.
만약 세전 연봉이 5,000만원이면 상위 20%다. 그런데 주거비, 교육비 쓰면 크게 남는게 없다는 소리가 들린다. 상위 10%도 마찬가지고, 다들 쉽지 않다고 한다.
주위에 상위 10~20%가 꽤 많은데,다들 죽는 소리다. 나야 아직 결혼을 안했지만, 결혼하면 들이붓는 돈이 장난이 아니라고 한다. 우선 주거비를 마련해야 한다. 주택담보대출 받으면 매월 몇백만원씩 은행에 바친다고 한다. 출산과 육아는 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라고까지 한다. 태아 시절의 검사-검진부터 출산 후 분유, 기저귀 등의 양육비. 물론 나는 안 낳아봐서 모른다. 솔직히 좀 뻥도 있을 것 같다. 애아빠-엄마들이 힘들다고 말은 하지데, 아이 사진을 보고 웃는걸 보면..
그래도 쉬워보이지는 않는다. 물려받은 재산이 엄청나게 많지 않은 이상, 임금 소득으로 삶을 꾸리는건 누구에게나 어렵다. 돈으로 돈을 벌만큼 많은 자산을 보유하지 않는 한, 몸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렴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그랬겠는가.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 노동자-자본가의 차이만큼이나 유자산가-무자산가의 차이가 커졌다고. 공장을 가지고 운영하는 중소기업 회장님보다, 회사에 소속되어 월급을 받는 삼성전자 사장님이 더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미래에 더 많은 자산을 축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산으로 줄세워보면 어떨까?
2. 자산으로 줄세우기
통계청 - 가계금융복지조사('19) 재구성
2019년 통계청이 발표한 「가계금융복지조사」를 보자. 5억 이상의 자산이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상위 40%다. 10억 이상이라면 상위 20%안에 든다. 아, 근데 이거 뭔가 이상하다. 아니 자산을 5억원이나 가지고 있어도 상위 20%가 안 된다고? 나 빼고 다 부자였던거야?
사실 이 수치에는 부채, 즉 '빚'까지 포함되어 있다. 집 사느라 빌린 모기지 대출 같은게 껴있다는 말이다. 9억원짜리 집이 있지만 그 중 8억원을 은행에서 빌린 사람보다는 대출 없이 5억원 짜리 집을 산 사람이 마음이 더 편할 수 있다. 부채를 제외한 자산, 즉 '순자산'을 확인해보자.
통계청 - 가계금융복지조사('19) 재구성
순자산을 보니 좀 더 현실과 가까워보인다. 전체 가구의 50%가 순자산이 2억원이 안 된다. 대출 다 제끼고 2억원 이상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중간 이상은 간다. 순자산이 4억원 이상이면 상위 30%다. 8억원 이상만 되어도 상위 10%다. '집에 돈 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빚을 다 빼고 주식-채권-예금 같은 금융자산 2억원과 6억원 짜리 집 한채만 가지고 있어도, 우리나라에서 상위 10%는 된다. 아 그리고 순자산 기준, 상위 10%가 전체 자산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자산은 임금보다 훨씬 더 불평등하게 분포되어 있다.
휴.. 월급을 얼마나 모으면 8억원이 될까? 한달에 200만원씩 모은다고 치면 일년에 2,400만원이다. 33년이 걸린다. 물론 재테크를 하면 모으는 시점이 훨씬 빨라질 수도 있다. 그래도 월급을 아무리 모아도 작다고 느껴지는건 기분 탓일까.
그런데 돈 좀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돈을 모은걸까? 하나은행이 금융 자산 10억원 이상 보유자를 대상으로 한 분석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뭘로 부자가 됐냐고 물어봤었는데, 결과를 보니 월급 모아서 부자되는건 쉽지 않아 보인다.
하나은행 - 한국 부자들의 자산관리 방식 및 라이프스타일('20) 재구성
사업을 하거나 부동산을 잘 굴려서 부자가 된 비중이 60%에 가깝다. 상속받았다는 비율도 20%에 달한다. 근로 소득으로 부자가 됐다는 비율은 15%에 불과하다. 여기서 유의해야할 건 '자산 형성 수단 1순위'를 물어본 거라, 부모의 경제력을 토대로 부자가 된 비율이 과소계상될 수 있다는 거다.
예를 들어 부모의 사업체를 승계해서 더 큰 부를 창출해내거나, 특정 시점에 물려받은 몇억원의 종잣돈을 토대로 부동산으로 대박을 낸 사람은 상속-증여로 부자가 됐다고 응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피터슨 경제연구소가 2016년에 발표한 「세계 억만장자 분석 보고서」를 눈여겨볼만 하다. 전세계 10억 달러 이상의 억만장자를 분석한 건데, 우리나라 억만장자 중 상속으로 억만장자가 된 비율은 74%에 달한다. 미국은 29%, 일본은 19%, 대만은 18%다. 우리나라 억만장자는 상속으로 그 자리에 간 비율이 다른 나라보다 훨씬 높다. 우리나라보다 세습 부자 비율이 높은 나라는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핀란드, 스웨덴 뿐이다.
3. 마르크스는 가고 피케티가 왔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거칠게 축약하면,노동과 자본의 끊임없는 대립 관계로 볼 수 있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한다. 착취당한 노동자는 소비력이 저하되고, 낮은 소비력은 수요 부족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수요 부족은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와 공황을 초래한다. 이걸 극복한 것이 사회주의 경제체제다.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에는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공장을 운영하는 자본가 사이의 대립이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연대-협력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는 주연배우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21세기에 부활한다면,자본-노동의 관계가 옛날처럼 단선적이지 않음을 단박에 알아차리게 되지 않을까?
2018년 한국경제신문의 분석이다. 10대 그룹 임원은 한 해 평균 4.5억원을 번다. 전무급 5.6억원, 부사장급 9억원,CEO는 20억원을 벌었다. 이들은 계약직 노동자다. 그렇지만 이들과 중소기업 노동자를 같은 노동자 계급으로 묶어서 범주화 해버릴 수 있을까?
삼성전자 사장과 중소기업 노동자는 '월급쟁이'라는 형식적인 고용 상태를 제외하면 그다지 유사한 점이 없다. 굳이 사장이 아니더라도 삼성전자 대리와 중소기업 대리 사이에도 꽤나 큰 간극이 있다. 이들이 함께 단결해서 자본가를 물리치는 혁명을 일으킨다? 현실성이 없다.
노동자-자본가의 관계를 대립일변도로 묘사하는건 펜시하지 않다. 이제는 자산의 보유 여부에 따라 사회경제적 위치를 결정짓는다. 마르크스가 가고 피케티의 시대가 왔다.돈이 돈을 버는 시대가 왔다.
하나은행과 마찬가지로 국민은행도 2019년에 금융 자산 10억원 이상의 부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인 「한국 부자 보고서」를 발표했다. 하나은행의 조사가 하나은행 이용자만을 대상으로 한 거라면, 국민은행의 조사는 한국은행 자금순환표, 국세청 종합 소득 과세 등을 토대로 최대한 큰 그림을 그렸다.
2018년 말 기준, 금융 자산 10억원 이상의 부자는 32만명이 있다. 그해 우리나라 인구가 5,100만명 정도니까, 상위 0.6%정도 된다.
국민은행 - 한국 부자보고서('19) 재구성
부자들의 연평균 소득은 2.2억원이다. 수입원이 흥미롭다. 위의 표에 정리해놨는데, 근로 소득이 63% 정도고, 재산 소득은 33%다. 평균적인 부자 가구를 가정하면, 주식/채권 같은 '자산'을 통해 7천만원을 벌었다는 의미다.
자산 50억원 이상 보유자로 시선을 돌리면 더 대단하다. 근로 소득 55%, 재산 소득 41%다. 돈이 많을수록, 자산으로 돈을 버는 비중이 더 높아진다. 공장을 운영하든 회사를 다니든, 모아놓은 '자산'이 한 개인의 경제적 위치를 결정짓는다.
진짜 부자가 되면 굳이 많은 일을 하지 않고 여유를 즐겨도 돈이 쌓인다. 노동-자본이 아닌 '자산' 보유 여부가 중요하다.자산은 더 많은 자산을 가져다준다.
소비 패턴이 환상적이다. 통계를 보면 월 평균 500만원 미만으로 소비하는 부자는 6%에 불과하다. '한달'에 1500만원 이상 소비하는 비중이 20%에 달한다. 인터넷에서만 봤던 아침-호텔 사우나, 낮-골프, 밤-쇼핑 후 수십만원 짜리 식사를 반복하는 삶이 실제로 가능하다. 그래도 돈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국민은행 - 한국 부자보고서('19) 재구성
부자들의 삶은 이렇다.
마르크스는 자본-노동 관계로 사회를 나눴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이제는 有자산가-無자산가로 사회가 나뉜다. 마르크스는 가고, 토마 피케티의 시대가 왔다. 철강왕 카네기는 구시대적 인물이다. 워렌 버핏이 우리 시대의 대표적 인물이다.몇백억, 몇천억의 자산이 있다면, '공장'이 없어도 계속 돈을 쌓아나갈 수 있다.
4. 재테크의 시대
찾고 보니 꽤 까마득하다. 집은 살 수 있을까. 다행히 나는 빚은 없다. 20대에는 걱정 없이 살았다.
그런데 내년에 나도 30이다.슬슬 '내 집 마련'이 걱정된다. 난 부모님한테 손 안 벌릴거다. 돈 주고나면, 부모님은 남은 인생 뭘로 사나? 난 몇 백억대 자산가의 후손이 아니다.
게다가 요상한 개똥 철학도 있다. "내 힘으로 집 못사면, 이건 대한민국 문제다." 안정적인 직장, 나쁘지 않은 월급, 빚도 없다. 이 상황에서 집 못사면, 내가 미친놈이든가 대한민국이 미친 거다. 근데 아직까지 스스로가 미친놈이라는 생각은 안한다.
근데 집 산다고 끝은 아니다. 앞 세대를 보자. 평생을 죽어라 회사에서 일했다. 애 둘 대학 보내고 집 한 채 샀다. 7~8억짜리 부동산 하나, 1억원의 금융 자산. 이러면 대한민국 상위 10%안에 든다. 진짜 평생을, 평생을 일했다. 그런데 노후 준비는? 은퇴하고 제 2의 (노동)인생을 살 계획을 짠다.
그러니 모두가 재테크를 한다. 미래가 불안하니까. 부동산, 주식, 펀드, 채권, ETF.. 자산을 모으기 위한 끝없는 경주! 연금 제도 확충 등의 사회적 차원의 접근보다,각자도생이 원칙으로 자리잡았다.
얼마전 아버지가 흥미로운 말을 하셨다. 50대가 지나보니 '저러고 어떻게 살까'싶던 친구도, 어떻게든 잘 살고 있다는 말. 20대인 나야 조금 사회를 시크하게 볼 텐데, 사람 사는 거 다 비슷비슷 하다는 거다. 큰 틀에서는 동의한다.
그래도 이재용이 평범한 50대와 비슷하게 살까? 난 아니라고 본다. 돈이 있으면 자신감 있게 미래를 기획할 수 있다. 단순히 소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실현 측면에서도 좀 더 주체적이고 당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심심해서 찾아본 앞의 통계들은 나의 뇌에서 코르티솔을 유발한다. "너 뭐하냐? 너도 슬슬 재무 관리를 생각할 때다" 스트레스 받는다. "아 몰라"
초등학생들은 모르는게 나오면 "아 몰라"하고 박차고 나간다. 모르는게 아니라, 마주하기 싫은 거다.
알기 위해 고생을 좀 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도 그렇다. 재테크도 알아보고 뭘 해야 한다. 근데, 나 지금은 휴직 상태다.
내년으로 미루겠다. 그때까지는 계속 책이나 보고 공부하고 놀 거다. 돈 안 되는 책들만 보겠지만. 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되려면 멀었다. 될 수나 있을까? 언젠가는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