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에서 스페인 뽕에 제대로 취했다. 날씨는 20도정도라 시원했고, 일몰도 9~10시쯤이라 맘껏 돌아다녔다. 9월의 스페인, 정말 좋았다.
적당히 시원한데 춥지는 않다. 해도 늦게까지 떠있으니, 굳이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다.
일찍 일어나봤자, 상점 문열지도 않는다. 대충 10시나 11시쯤 일어나, 늦게까지 노는 거다.
세비야에서 스페인의 매력에 스며들 때쯤, 다음 여행지인 론다로 이동해야 했다. 론다까지 렌트카로 이동하고자 했다. 렌트카 수령이 오후 3시였는데, 계획보다 덜 게을러서 1시에 도착했다. “이른 수령”이 되어버린 것.
BMW X1을 예약했는데, 일찍 와서 차가 없다고 Oppel Mokka라는 차를 줬다. 마음이 살짝 상했다. 뭐 어쩌겠나, 게으르겠다고 한국에서부터 마음을 먹은 내 잘못이다. 처음보는 브랜드였는데, 나름 SUV라고 힘도 쎄고 승차감도 좋았다. 그래도 BMW를 몰고 싶었다.
내가 받은 차(왼쪽) / 내가 신청한 차(오른쪽)
서운함을 떨쳐내라는 신의 계시였을까? 론다 가는길이 정말 예뻤다. 드라이브를 좋아하다면 누구라도 경탄을 금치 못할 풍경이다. 아래의 사진과 동영상의 풍경이 2시간 정도 계속된다.
실제로는 훨씬 예뻤다
아빠가 정말 좋아하셨다. 10년전, 아빠는 네 식구를 자동차에 태우고 미국/캐나다를 일주하셨다. 10년이 후 지금, 이젠 내가 아빠를 모시고 스페인을 일주하고 있다. 꽤 뿌듯했다.
“제가 다 컸습니다. 이제는 제가모실께요.”
흔한 스페인의 평원
2시간 가량, 동화 속 풍경길을 운전하다보니 론다에 도착했다. 해발고도 739M에 위치한 시골 도시. 참고로 평창이 700M다.
세비야가 문화와 역사를 감상하는 도시라면, 론다는맑은 공기 마시고 경치보며 힐링하는 도시다.
멀리서 바라본 론다(좌) / 절벽 위에 매달린 론다의 집들(우)
누군가에게 론다는 무미건조한 조그마한 시골 도시일거다. 그렇지만 나는 숙소를 잘 잡았고, 론다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누에보 다리 바로 옆의 숙소.
국영호텔 파라도르보다 더 뷰가 좋다는 생각을 했다. 발코니만 있던 파라도르에 비해, 내 숙소에는 뻥 뚫린 루프탑이 있었다.
숙소에서 바라본 론다. 바라만 봐도 행복했다.
이곳에 앉아 와인/신라면/하몽을 먹고 있노라면, 신선이 따로 안 부럽다는 느낌을 받았다.누에보 다리의 야경을 자기 전까지 마음껏 눈에 담았다.
힐링은 꼭 발리 같은 곳에서만 할 수 있는건 아니다.
도시가 아담하고, 가로등도 많았다.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새벽에는 클럽 비스무리한 바를 갔다.
여기서 놀랬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 분들은 EDM에 맞춰서 춤추고 있었다. 쎈 술을 마셨는데, 술이 좀깼다. 이거 뭐지?
신기했고, 보기 좋았다. '흥이 남'에 나이 구분이 있는 것도 이상하고, 늙었다고 '흥을 자제'하는 것도 웃기다. 이 분들이 젊었을 때, 클럽/바 문화가 유행했으니 늙어서도 자연스레 즐기는게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될까?
괜히 헤밍웨이라는 대문호가 이 곳에서 글감 얻고 작업한 게 아니다. 특히 연인끼리 오면 참 좋을거다. 아무리 싸워대는 연인도, 이곳에서는 싸우지 않을것 같다. 이렇게 예쁜 곳에서 싸우면, 그건...
평화로운 론다의 거리
II. 광고에 나올법한 드라이브 코스와 흰색으로 덧칠된 산속 마을, 자하라
세비야에서 론다로 향하는 길,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풍경이 있었다.산 위에 새하얀 마을이 있고, 그 위에 성이 있었다.
에어비엔비 체크인 시간 때문에 바로 들리지는 못했지만, 계속 궁금했다.
“아까 본 거 도대체 뭐야?”
시에라 데 자하라. 그곳의 명칭이었다. 구글,네이버에서 검색해보니, 그곳이 맞았다. 론다에서 1시간 30분 가량 걸린다.
됐다, 반나절을 알차게 보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이동 중에 이 마을을 봤다. 호기심이 나에게 찾아왔다
론다에서의 둘째 날 아침, 자하라로 출발했다. 가는 길이 장관이었다. 드라이브 코스에 나올 법한, 그런 도로였다. 풍경은 아래의 사진과 같다. 사진에 도로가 보이는데, 이 도로를 통해 운전해서 산골 마을로 올라오면 된다.
눈으로 보면, 참 장관이다
론다에서 제일 맛있다는 초콜릿/스타벅스 캔커피/여분의 물을 차에 가득 채우고, 좋아하는 노래를 켜고 차에 시동을 거니, 속세의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드라이브를 좋아하면 강력 추천한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오토바이족'들이 즐겨찾는 코스라고도 한다.
그래서 할리 데이비슨이 많았나 보다.
스페인의 남쪽인 안달루시아 지방. 이곳은 하얀색 건물이 특징이라고 한다. 하도 태양이 뜨거워서, 열을 가장 잘 반사하는 색깔로 골랐다고 한다. 나는 흰색으로 덧칠해진 마을은 처음봐서, 마냥 이뻤다.
앞서 말했듯, 이곳은 산중 마을이다. 그리고 산 정상에고성이 있다. 고성으로 가기위한 트래킹 코스도 있는데, 고성에서 보는 풍경도 예쁘다. 성 내부는 굉장히 어둡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가볼만 하다.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 사진, 꽤나 쉽게 건질 수 있다.
자하라의 고성(좌) / 안달루시아의 특징인 하얀 건물(우)
이곳의 동양인은 나와 아빠 밖에 없었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게다가 배낭여행의 경우, 차를 빌리는 경우가 흔치 않다.
만약 당신이 자동차를 빌렸고 시간도 여유롭다면, 한번쯤 들를만하다. 훌륭한 드라이브 코스, 멋진 자연 경관, 그리고 남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을 왔다는 성취감을 선물해주는 곳이다.
III. 그라나다로 가는 길에 만난 흔치않은 기암괴석, 엘 토르칼 국립공원
론다에서 그라나다 가는 길.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안달루시아 지방 특성상 운전이 엄청 지루하지는 않다. 넓은 평원과 곡창 지대가 이어지다 보니, 시야는 뻥 뚫려있다. 게다가 차들도 많지 않다. 그 넓은 평원에서 운전하다보면, 모험가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바로 그라나다로 가기에는 아까워서, 가는 길에 들릴만한 곳을 찾아봤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엘 토르칼 국립공원(El Torcal de Antequera).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기암괴석 지대다.
기암 괴석으로 가득한, 엘 또르칼 국립공원
화성이나 달에 온 느낌이었다. 물은 보이지 않고, 사막같은 곳에, 키작은 나무들만 자라고 있다. 푸르른 안달루시아 평원에, 괴석으로만 구성된 '돌산'이 혼자 우뚝 서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우라는 동물을 봤다. 황량한 이곳과 꽤나 잘 어울렸다. 여우를 비롯한 다양한 동물들이 목격된다고 한다. 특이했다.'기괴'한 자연의 풍경이다.
동양인은 한명도 못 봤다. 가족 단위로 트래킹하러 오는 유럽인들이 많았다. 들리는 언어도 다양했다. 스페인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위키피디아는, 이곳을 “It is known for its unusual landforms, and is regarded as one of the most impressive karst landscapes in Europe”라고 묘사한다. 유럽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곳이었다.
트래킹 코스가 제법 잘 갖춰져있다. 40분/2시간 코스로 나뉘어져 있는 듯 했다. 나는 그라나다로 이동하는 중에 살짝 들린 거라, 1시간 정도 걷다 되돌아 왔다. 돌이켜보니 아쉽다. 시간 좀 걸리더라도 끝까지 돌껄. 여행가서 할까 말까 싶으면, 무조건 해야 한다. 앞으로는....
자연과 드라이브를 좋아하면, 한번 들를만하다. 충분히 멋있고, 감명깊은 곳이다.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다면, 특별한 관광 정책 없이도 일등 관광 명소가 됐을 거다.
옛 스페인 조상들이 정착을 잘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독특하거나 엄청나게 장엄한 느낌을 주는 자연 풍경이 부족한 느낌이다. 북한에는 뭐 좀 있나? 에이, 됐다. 그래도 우리나라 정도 되는 나라 없다.
IV. 이슬람의 역사가 남아있는 유럽,그라나다
그라나다. 이슬람 세력이 마지막까지 저항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이곳을 마지막으로 점령하면서, 스페인은 레콩키스타를 완성한다.
그라나다 전경
여담인데, 영토 재복원을 의미하는 ‘레콩키스타’도 본인들 입장에서 서술한 것 같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처럼.
이곳에 살던 이슬람인에게, 그라나다는 그냥 자신들의 땅이었을 거다. 힘이 약해서 스페인에게 뺐긴 거고, '재복원'이라는 개념은 역사가들이 사후적으로 덧칠한 걸 거다.
우리나라에서 만주 땅을 '재복원'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어쨌건, 이베리아 반도에서 한때 맹위를 떨쳤던 이슬람 세력의 근거지라 그런지 꽤 컸다. 이슬람 느낌도 물씬 풍겼다.
세비야가 깔끔한 백화점이라면, 그라나다는 번잡스럽고 정리가 될 된 재래시장같다.
구릉 지역에 건설된 그라나다. 구불구불한 산길, 미로 같은 도로, 이슬람과 유럽 문화의 혼합. 정밀한 도시 계획을 통해 방사형으로 건설된 여느 유럽 도시들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완전 시장통이네 이 도시”라고 혼잣말을 한 후, 적절하게 묘사했다는 생각이 들어 흡족했다.
좀 시장같았다
도착 당일, 저녁 음식이 좀 충격을 줬다. 아빠의 희망에 따라, 이슬람 음식점에 갔다. 음식점도 꽤 예뻤다.이슬람 풍이었는데 확실히 특색 있었다.
아빠는 행복해하셨다. 단,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아랍을 가봐야겠다. 그라나다 오니까 아랍 느낌이 난다. 참 매력있다.”
아빠는 음식을 가리지 않으신다. 대부분의 음식을 맛있게 드신다. 이건 내가 꼭 배워야할 장점이다.
그렇지만 아빠는 이슬람 음식에 무릎을 꿇으셨다. 못 드셨다. 스페인 여행 중 처음으로, 레스토랑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셔서 라면을 원하셨다. 함부로 이슬람 음식에 도전하지 말지어다. 특히 강한 향신료를 못 버틴다면. 근데나는 잘 먹었다. 난 케밥 좋아한다. 아빠에게 장난을 쳤다.
“아빠, 저는 입맛에 맞는데요? 한 번 도전 해보셔야죠. 맨날 저 입 짧다고 뭐라고 하셨으면서..”
그라나다는 역시 알함브라 궁전이다. 마드리드 궁전에서 실망했던 나. 알함브라 궁전은 달랐다. 이슬람과 유럽이 융합된 이 궁전. '알라딘'이 생각났다. 지니와 램프도 생각났다.
알함브라 궁전은 3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알 카사바, 나스리 궁전, 헤네랄리페가 그것이다. 각자의 매력은 다 다르다.
알 카사바는 성이다. 방어 목적의 성 정도? 중동 사막 지역의 색깔로 덧칠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는 도심이 다 보인다.
왕은 여기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 왜 왕으로 태어나서, 이런 일을 맡게 됐을까?”
“내가 이 도시를 잘 이끌어 나가야겠다”
알 카사바(좌) / 알 카사바에서 바라본 그라나다(우)
둘 다 드라마 대사 같다. 평범한 지도자는 아마 이러지 않았을까.
“어휴, 무이비엔 걔는 행정을 왜 그딴식으로하는지 모르겠다. 지지도 떨어지게. 아디오스 걔는 세비야 왕한테 왜 내 말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거야. 저번에 만났던 세비야 외교관은 말 잘하더만. 부하라는 놈들이 왜 이모양인지, 힘들다 힘들어. 나도 너네처럼 그냥 월급 따박따박 받고 시키는 것만 하면서 살고싶다.”
사실 왕은미친 짓만 안해도 평타 이상은 친다.
우리가 떠올리는 전형적인 알함브라 궁전은, 아마 나스리 궁전일 거다. 내부가 정말 화려하다. 이국적인 아름다움이다. 프랑스로 대표되는 유럽의 사치적 화려함과는 느낌이 다르다.
알함브라를 대표하는 나스리 궁전
베르사유 궁전이 “도도하고 차갑고 시크한 우리, 너가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을 한다면,
알함브라 궁전은 “살갑고 뜨겁고 오밀조밀한 우리, 우리는 끝장나게화려해!”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여기, 정말 이뻤다.
알함브라는 하루를 다 투자할 정도로 볼 게 많다. 아, 그리고 여기 국영호텔 레스토랑의 분위기와 맛이 끝내준다. 가격도 일반 음식점 수준이다. 전날 받았던 이슬람 음식점의 충격을 이곳에서 완벽히 치유했다.
저녁에는 야경을 보려고 크리스토발 전망대와 산 니콜라스 전망대를 갔다. 한 곳만 가는 경우가 많은데, 둘 다 가보길 추천한다.
크리스토발 전망대는 그라나다 도심을 보기에, 산 니콜라스 전망대는 알함브라 궁의 야경을 보기에 유리하다. 전망대 가는 길이 위험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 그룹으로 가는걸 추천한다. 특히 여자라면 더욱. 길가에서 대마 냄새가 좀 났고, 술병들고 노상 까는 사람들도 많다. 좀 쎄했다.
다시 생각해도 빵 터지는 건, “몇 명이서오셨어요?”라는 작업멘트를 산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들었다는 것. 물론 내가 말한 건 아니고, 옆의 사람들이 옆의 사람들에게 말한 걸 들었다. 외국에서는 한국말이 더 크게 들린다.
불타오르는 청춘의 현장. 그 남자들과 여자들 모두, 서로를 괜찮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마 그날, 무슨 일이 있었을 거다. '그래, 참 좋을 때다' 싶었다. 물론 나도 20대지만. 설마 나보다 형은 아니겠지?
혼자 '알함브라' 맥주 마시면서/알함브라 궁전을 보면서/누군가의 로맨스를 엿들으며/나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그라나다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