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아주 나쁜 자식이 된 것 같다
열두 번째 일기
왠지 아주 나쁜 자식이 된 것 같다. 물론 실제로도 그런 편이다.
부모님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모욕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같은 인간으로서 바라볼 때 이런저런 불만이 많았을 뿐이다. 어쨌든 태어난 나를 키우는 동안 최소 수백에서 수천만 원의 돈이 들어간 것은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또한 내가 태어남으로 인해 부모님이 포기했을 것들, 나를 키우느라 희생된 시간과 소모된 감정을 생각하면 내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일도 아니다. 애초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누가 더 많은 손해를 입었느냐를 따지는 일 자체가 일반적이지는 않겠지만.
부모님이 나를 키워낸 일을 생각하면 천만 원의 대출 정도는 자식으로서 행하는 도리라고 나 자신을 달래며 넘길 만하다. 하지만 나의 불만은 금전적인 부분이 아니다. 부모님의 태도에 있다. 그들은 마치 내가 부모라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인생을 갖다 바치라고 협박한 것처럼 굴곤 한다. 그게 그들의 가장 큰 문제다.
자식의 탄생은 철저히 부모에게 책임이 있다. 배은망덕한 말이지만 명백한 사실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혼자 잉태하여 혼자 태어나는 인간은 없다. 자웅동체가 아닌 이상 지구상 어떤 생물도 성모 마리아처럼 처녀 수태를 하지는 않는다. ― 애초에 처녀 수태로 태어난 예수조차 일종의 신화지만 ―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 모르는 게 아니라 알면서 애써 부정하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자식은 부모로부터 탄생을 '당한' 입장이 된다. 기묘한 표현이지만 자식으로 태어난 인간은 부모로부터 일방적으로 생명과 삶을 부여받았고, 어느 정도 성장하여 경제적 및 정서적으로 독립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부모에 의해 인생 전반이 정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쌍한 운명을 타고나는 존재.
지배자인 부모의 형편과 인품으로 인해 인생의 시작점과 행복도가 결정되는 나약한 피지배자. 나는 그런 자식이었다. 부모가 개망나니라면 아이의 인생은 당연히 시작부터 불행이다. 시작이 뒤틀리면 전반적인 삶 또한 어두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피해를 준 사람들이 일절 반성하지 않아도 피해를 받은 사람이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게 현실이다. 참 억울한 일이다.
그나마 자식을 방치하거나 학대했던 부모가 뒤늦게 반성하고 갱생한다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아예 인연을 끊고 완전히 남남으로 살거나. 그러나 자식의 삶을 망친 부모가 때로는 지나치게 당당한 경우도 있는 법. 그런 사람들은 자식을 낳고 일정 기간 키웠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스스로 대견스럽게 여긴다. 혹은 결혼과 가정과 아이 때문에 자기 인생이 망가졌다며 애달픈 자기 위로를 삼키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닌 증오. 일말의 사랑이 담겨있다고 한들, 부모가 자신을 미워하고 거부하는 감정을 체감하는 자식이 어찌 부모를 온몸으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모성애와 부성애는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부모들은 확실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신들이 한 인간을 태어나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했다는 책임감 말이다. 나는 그 부분을 확실하게 말하고 싶다. 모든 부모가 죄인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나의 부모님 또한 피지배자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힘들게 성장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모두 자식이었거나 자식이다. 같은 자식으로서 품고 사는 애증을 모른 체하고 살 나이는 지났다.
부모님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어쩐지 부모님을 향한 원망이 잔뜩 묻어난 듯하다. 미워하는 사람은 마음이 편하다던데, 어째서 나는 이토록 실컷 미워해도 후련함보다는 죄책감이 먼저 든단 말인가? 아무래도 어린 시절부터 받은 세뇌가 아직도 단단하게 남은 모양이다. 부모님의 영향이 아직도 나의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게 분명하다.
집에서 독립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았다. 역시 경제적 자립과 물리적 분리만이 독립(獨立)의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나는 살아가는 동안 평생 부모님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만 성장의 장점은, 나의 삶을 타인이 불행하게 만드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인간은 자랄수록 선택권을 가지고 능력을 기른다.
나는 부모님의 제안을 언제든지 거절할 수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일방적인 절연 또한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노후를 보내는 동안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도 점점 쇠약해질 부모님은 어떻게 될 것인가. 거동이 불편해지고 말도 잘 나오지 않게 될 부모님은 천륜을 등지고 떠난 나를 후레자식이라고 욕하거나 낳지 말아야 할 자식이었다며 서로를 탓할 것이다. 그리고 죽어갈 것이다. 그리움도 죄책감도 반성도 없이, 이기적인 마음을 먹고 자라나는 나무로 빽빽하게 채워진 외로움의 숲 속에서.
그때쯤 되면 나 또한 죄책감보다는 후련함을 먼저 느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