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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May 29. 2023

허공에서도

자작시


나는 어느 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허공에서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닫기 훨씬 전부터.

내가 처음으로 학교를 졸업하기 훨씬 전부터.

내가 처음으로 소설책을 펼치기 훨씬 전부터.

내가 처음으로 연필을 깎기 훨씬 전부터.

내가 처음으로 일기를 쓴 날보다 훨씬 전부터.

내가 처음으로 엄마를 부른 날보다 훨씬 전부터.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아무튼 누군가가 언제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게 중요한 건 허공에서도 충분히 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장마철이거나 태풍이 찾아오거나 비가 많이 내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죽는 건 비가 내리기 전일 것이다.

사랑해 마지않지만 정작 태어난 이래 한 번도 동공을 마주하지 못한 새벽녘을 볼 것이다.

짙푸른 세상은 한껏 물기를 머금은 숨으로 나를 반길 것이다.

바다에 통째로 잠기듯 서서히 침잠하는 곳에서 나는 호흡할 것이다.

알던 길을 걷고 몰랐던 길을 걷고 알아야 했던 길을 걷고 몰라야 했던 길을 걸을 것이다.

걷다 보면 길은 끝에 다다를 것이고 나는 허공에 발을 내디딜 것이다.

신발 밑창이 흙바닥을 밟기 전에 공중으로 높게 떠오를 것이다.


허공에서도 죽을 수 있었다.

텅 빈 공중에 덩그러니 놓인 밧줄이 나를 붙잡을 수 있었다.

나는 숨 하나 막히지 않고 서서히 죽어갈 수 있었다.

매달린 곳도 매달은 것도 없는 밧줄은 외로움에 줄줄 눈물 흘릴 것이다.

그러면 그제야 비로소 세상에도 빗방울이 쏟아지고 슬픔이 빗발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허공에서 죽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죽인 밧줄은 내내 외로울 것이다.

나는 어느 날 이것을 알았고 그건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독에 젖은 밧줄만을 두고 떠날 수 없다.

허공에서는 나의 죽은 육체를 거두어 불에 태우지 못한다.

젖은 몸과 마음에는 불이 붙지 않을 것이고 나는 종이처럼 녹고 녹아 흩어진다.

공중으로 떠올라 숨이 끊어진 나는 밧줄을 보고 울었다.

세상과 함께 울다가 잿빛으로 물든 땅에 누워 엉엉 울고 만다.


허공에서도 죽을 수 있다.

공허한 밧줄 하나 남긴 채 떠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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