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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Jan 20. 2024

뱃속

자작시


아주 커다랗고 기괴하고 고요한 괴물의 뱃속이 있어요.


우리는 괴물의 내장이나 융털에서 태어난 겁니다.


나를 낳은 분들과 나보다 먼저 태어난 형제들도 이미 괴물의 체내에서 파생된 것이지요.


우리는 이미 정체 모를 괴물에게 먹혀, 그의 뱃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주 멀쩡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각할 수 없을 만큼 느리게 소화되고 있는 거지요. 언제 갑자기 온몸이 흐물텅 녹아버릴지 모르는 일입니다. 괴물은 자주 허기에 괴로워해요. 하늘에서 갑자기 빛이 번쩍 솟아나며 요란한 소리가 들리곤 하는 게 바로 그 증거지요. 쿠러렁 쿠콰다당. 이 괴물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먹어치우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뱃속이 아니라 배 속이 맞는 표현이라고요? 글쎄요. 비단 틀린 단어만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이미 괴물에게 먹혔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를 먹거나 먹어치우거나 먹히며 삽니다. 우리는 그저 괴물의 체내에서 아주 느리게 소화되고 있는 음식에 불과한 데도요. 이미 배가 부른 자들은 배가 부풀어 오르다 못해 혀와 치아와 위와 소장을 모조리 토해내며 죽어가더군요. 이미 배가 고픈 자들은 그렇게 굶고, 굶고, 굶다가, 어느 순간 살가죽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집니다.


그 마르고 마른 뼛가루는 허공을 타고 날아갔고, 훗날 비와 함께 떨어졌어요. 그들의 눈물은 곧 하늘의 눈물이 되었습니다. 촤아아아 쑤아아. 배가 부른 자들에게 먹힌 배가 고픈 자들은 그렇게 울었습니다. 내가 직접 들었으니 압니다.


우리는 괴물에게 먹혔고 그와 동시에 괴물 안에서 태어났지요. 하지만 괴물과 난 다릅니다. 괴물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내가 괴물과 동질인 건 아닙니다. 나를 낳은 존재는 나와 열 달 동안 탯줄로 연결되어 있었던 어머니지만, 내가 생명체로 탄생하는 순간 나와 어머니가 철저히 별개의 존재가 되는 것처럼요. 나는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났으나 나는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러니 괴물의 몸속에서 태어난 나도 괴물이 아닙니다.


파생과 존재는 엄연히 다른 말이지요. 그런데 나는 왜 그걸 구분하지 못하고 자란 거지?


눈을 감으면 괴물의 노랫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괴물은 아주 커다랗고 기괴하고 고요한 존재예요. 그래서 끔찍하고 공포스럽지요. 괴물은 아주 거대한 몸집을 가진 주제에 아주 작고 작고 세밀하고 첨예한 목소리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 귓가에 노래를 부릅니다. 허공을 타고 사라진 이들의 눈물과 신음에서 나오던 노래. 눈과 귀를 팔아 위장을 그득하게 채운 이들의 다리 사이로 투두둑 투두둑 떨어지는 지독한 것들의 노래.


오늘 나의 발자국 하나가 문득 사라져 있었습니다.


내 발등에 떨어진 강한 산성이 나의 발목 하나를 녹여버린 탓인가 보군요. 이렇게 괴물의 뱃속이 추악합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괴물의 뱃속에 잘도 서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복잡하고 요란스러울 줄 알았던 나의 존재 따위는 허공에 부유하는 먼지 부스러기가 되어 버리는 바로 이 뱃속. 육중한 몸을 이끌고 무언가를 먹어치우러 엉금엉금 걸어가는 괴물의 냄새나는 위장 어딘가에서요.


쿠구구콰광쾅. 하늘이 또 칭얼댑니다. 이 끔찍한 괴물은 배가 부를 줄 모르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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