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정의하는 일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를 쓴다. 멍하니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장면 하나를 문장으로 쓰면 단어에서 파생된 수많은 것들이 우후죽순 꼬리 잡기로 늘어난다.
시인들은 정말 '무언가를 담을 의도'로 시를 쓰는 게 맞을까. 시는 무엇을 담고 있기에, 그토록 세밀하고 장황한 문장으로 세계관을 이룰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들은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시를 쓰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갑자기 붙잡은 한 개의 단어를 시작으로 기승전결 따위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시를 마구 써내듯이.
누군가는 시를 정의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정의하지 않는다. 박연준 시인은 시를 '설명하기 싫어하는 글'이라고 말했고 나는 이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시가 그렇게 많았던 사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어서였다. 설명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한눈에 알아채지 못할 수밖에!
시를 '사랑하는 일' 혹은 '살아가는 일'이라고 표현했던 글도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어쨌든 무언가를 사랑하면 글이 나오고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시를 써야 하는 사람도 있다. 독서는 귀찮은 일이고 글을 쓰는 건 더욱 귀찮고 괴로운 일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책과 글을 빼앗긴다면 나는 온종일 예민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사람이 되어 안절부절못할 것이다. 그렇게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이야 없다.
시는 신기한 글이다. '시적인 표현'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쓰지 않는 새로운 말이 아름다움과 더해졌을 때 하는 말인데, '시(詩)'라고 일컫는 문학은 천차만별이다. 아름답고 찬란한 글이었다가 초라하고 볼품없는 글이기도 하고, 투명하고 담백하구나 싶다가도 굳이 이렇게 억지로 꾸며낼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추했다가 예뻤다가 이상했다가 무거웠다가 가벼웠다가…. 여하튼 시는 읽기 어렵다. 읽는 방법도 마땅히 배우지 않았다. 애초에 배워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 시를 배울 때는 연을 하나하나 떼어 놓고 문장과 단어를 해부했었다. 그래서 시가 시인 줄도 몰랐고, 문장을 읽으며 마음으로 느낄 틈새도 없었다.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내용을 열심히 메모했고 알록달록한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밑줄을 쳤다. 내가 어떤 시를 읽고 배웠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정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가 그토록 비밀스러운 비유와 상징과 은유로 이루어져 있단 말인가? 일단 어른들은 그런 시를 좋아할 것이다. 그래야 교과서에 실을 수 있고 낼 문제가 많을 테니까.
우리나라는 학교에서 문학 수업을 많이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 문학 교과서가 재미있던 시간은 문학 수업 시간이 아닐 때였다. 글과 친해질 시간도 없이 무작정 주입하듯 배우기만 하는데 어떻게 문학에 흥미를 느낄 수 있을까. 마치 영어 단어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들을 앉혀다가 난데없이 원어민의 대화를 듣고 영어 문장을 그대로 쓰라는 것처럼, 그것은 무척 가혹하고 폭력적인 일이다.
내가 쓰는 시는, 어쩌면 시라고 부를 수도 없는 어떤 문장들의 반복일 뿐이다. 시집을 읽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왜 이런 시를 썼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의아한 순간이 많다. 그것은 분명한 나의 문학적 소양 부족에 의한 문제. 그러나 모든 책임이 나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그와 동시에 이해의 유무를 떠나 아름답고 서글프고 낭만적인 시는 세상에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안다. 시는 이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문학이 아니니까. 그래서 시를 읽으며 화를 내면서도 자꾸 시를 읽고, 심지어 쓰기도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반쯤 흐릿한 정신으로 쓰다 보면 얼추 시 형태를 띤 무언가가 된다.
매일 시를 쓰자고 호기롭게 도전했지만, 역시 글은 쓰고 싶다고 갑자기 써지는 게 아니다. 모든 문인들을 존경한다. 단 하나의 무언가를 위해 만들어지는 시를 사랑한다. 내가 쓰는 시는 그런 것들을 위한 글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