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에 죽기로 결정했다
시작하는 글
서른 살에 죽기로 결정했다. 서른이 될 때까지 다른 이유로 ― 갑작스러운 자살, 타살, 사고사, 병사, 돌연사 따위가 나의 삶을 갑작스럽게 끝내는 일 ― 죽지 않는다면 아마도 서른 살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자살일 것이다. 타인이, 시간이, 병이, 세상이 나를 죽이기 전에 스스로 내 목숨을 끊을 생각이지만 그것이 온전히 내 손으로 이루어진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어쨌든 서른에 죽기로 결심했으니 이 순간부터 나는 늦어도 서른 살에 죽는 사람이라는 기막힌 운명이 결정된 셈이다.
물론 이 결심이 언제 갑자기 변덕스럽게 낯빛을 바꿀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모르고 신도 모를 것이다. 애초에 신은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는 줄곧 인류의 역사와 함께 흘러왔다. 지겨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인류가 멸종하기 전까지도 나타나지 않으리라 믿는다. 신의 존재는 믿지 않는 편이다만, 정말 신이 있다면 나만큼 변덕스럽고 우울하고 골치 아픈 존재라는 확신도 있다. 독실한 종교인들이 들으면 내게 뭇매질할 소리다. 온 세상이 음모를 꾸민다는 망상을 가진 사이비 집단도 떠오른다. 그럼에도 나의 주장을 철회하지는 않겠다.
이 글은 내가 죽기 전까지 어떤 하루와 어떤 생각을 기록하는 일기임을 알린다. 일정한 기간도, 두서도, 기승전결도 없다. 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스스로가 쓴 ― 유서인지 일기인지 모를 ― 글을 천천히 씹어 먹고 싶지 않다. 찌질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결함과 졸렬한 내면을 고대 유물 발굴하듯 낱낱이 파헤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어쨌든 글은 시작되었고, 한 번 태어난 글은 죽기 전까지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죽이는 존재는 내가 아니다. 글은 참 무섭다. 아무리 지우고 태워도 평생 세상에 남는다. 아무도 읽지 않았더라도 나만은 그걸 안다. 내가 쓴 글이 있고, 내가 읽은 글이 있고, 이내 내가 지워버린 글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글은 쓰는 순간 평생 나의 그림자에 촘촘하게 새겨져 붙어 다닌다. 무서운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조심스럽게 글을 쓰겠다. 유서 일기. 나는 서른 살에 죽기로 다짐했으므로 딱 서른 개의 글만 쓰겠다. 이게 유서인지 일기인지 혹은 대상 없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 자신도 모른다. 글의 무서운 점이 하나 더 발견되었다. 쓴 사람도 있고 읽는 사람도 있지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
첫 번째 일기
누구는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서른이라면 너무 젊은 나이 아닌가. 서른 살에 초등학교부터 대학교를 전부 다시 다닌다고 쳐도 고작 사십 대 중후반이다. 반백조차 되지 않았다. 서른 살에 시작한 업종에 십 년 동안 종사해도 고작 마흔이다. 서른이면 얼마든지 새로운 배움과 도전이 가능한 나이로 여겨진다. 삶을 시작하지도 않은 나이라는데 대뜸 그때 죽겠다니, 이게 제정신으로 할 말인가 싶을 것이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죽음을 결심한 일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이유는 있지만 그것을 특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단 내가 태생적으로 우울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이라는 사실이나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성장했다는 불우한 과거 따위가 있다. 또한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일을 수치스럽다고 여기는 인간이다. 한 무더기의 부끄러움이 매달린 삶을 자주 수치스럽게 여긴다. 그 감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인간의 감정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도무지 어디서부터 대뜸 솟아나서 이토록 인간을 괴롭히는지를 매일 의문이라고 생각했다. 뇌 과학적으로 본다면 감정은 그저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에 의한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뇌의 일부분이 손상되거나 마비되거나 변형되면 감정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나치게 감정에 무뎌지거나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그래서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들이 나온다. 인간이지만 인간성이 없고 사람이지만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기이한 부류가 생겨난다.
인간은 이성과 감정 중 어느 것을 더 중요시해야 하는가. 인간은 짐승보다 뛰어난 이성과 지성을 지녔기에 우월하다고 말하는가, 아니면 짐승이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복잡하고 섬세한 감정과 감성을 지녔기에 우월하다고 말하는가? 만약 그것이 인간 우월의 중심이라면 기분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고 이성적이지 못한 한심한 인간의 자격을 박탈해야 할까,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무자비하고 잔혹한 인간의 자격을 박탈해야 할까. 인간의 모순은 바로 같은 인간의 선악을 판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나온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그 부분에서 지독한 염증을 느꼈다. 인간 혐오는 아니다. 나에게는 분명 인류애가 있다. 인간과 사람의 질감을 다르게 느낀다. 사람은 모두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고 그것을 위해서 모든 인류가 합심하며 공존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백만 원도 되지 않는 월급에서 굳이 타인을 위한 기부금을 내는 것은 내가 선한 인간이라는 착각에 빠지거나 그런 쾌감을 느끼고 싶어서가 아니다. 권력자들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일어나는 전쟁과 그 속에 존재하는 학살, 기아, 상실, 이별, 고통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하지만 내가 고작 한 달에 지불하는 몇만 원의 돈으로는 끔찍한 전쟁도, 가족과 터전과 평화를 잃고 하루하루 연명하는 이들과 죽어가는 이들의 고통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이 무력한 인간이라는 점에 항상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머리로는 알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는 나의 우울에 큰 기여를 했다.
비단 이런 생각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나 또한 수치스러운 흑역사가 여럿 있다. 다른 사람에게 놀림거리가 되거나 꾸지람을 들은 일 또한 수치스럽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자괴감과 실망을 느낀 나날을 도무지 지울 수가 없다. 가령 어려움을 맞닥뜨린 사람을 못 본 척 지나치면서 불현듯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될까 봐 걱정했다거나, 욕심 때문에 타인을 속이고 얄팍한 이익을 취했다거나, 잘못을 들키기 싫어 거짓말을 했다가 곧바로 들키고 말았다거나. 그런 일들은 정말이지 나를 끝까지 쫓아온다. 기억에서 사라지지도 닳지도 않는다. 내가 가장 혐오하면서도 부러워하는 사람은 떳떳하지 못한 일에 떳떳한 사람, 자신의 행동을 구태여 합리화하지 않는 사람, 이기적이면 이기적인 대로 사는 사람, 내 일이 아니면 알 바 아니라며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부러워서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어차피 선한 인간이 될 수 없다면 그걸 얌전히 받아들이고 적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해타산적이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면 될 일인데, 나는 그걸 이루지 못했고 결국에는 자괴감과 죄책감과 부끄러움만 가득한 생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서른에 죽자고 생각했다. 더는 이 세상에 나라는 인간의 존재를 남기고 싶지가 않아서다. 그건 누구에게도 유해한 일이 아니다. 내가 죽음으로써 손해 보는 사람은 없다. 그 점은 나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서 나의 감정과 기억을 영영 없애려면 뇌를 통째로 갈아버리기라도 해야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대신 죽으면 어떨까 생각했을 뿐이다. 사실 내가 죽더라도 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 자체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어떠한 순간의 기록이 되겠지만 내가 살아있었음을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면, 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점도 내가 죽음을 택하는 데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내가 죽으면 나의 존재는 그걸로 끝이라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