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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Aug 25. 2024

도태된 잔상

자작시_56


엄마는 십일월 이십일마다 수제비를 끓인다

그것은 일 년에 단 하루만 먹을 수 있는 음식

십일월 이십일이 지나면 다시 일 년이 흐를 동안 돌아오지 않는 음식

반죽에 감자 전분을 섞어 쫄깃한 수제비를 만든다

애호박과 당근과 양파와 대파와 버섯을 넣고 다시마와 멸치를 넣고 한참 국물을 끓인다

냄비가 팔팔거리는 소리 신열이 난 몸처럼 뜨끈하게 데워지는 냄새

집은 고요하다 먼 곳에서 쏟아지는 눈처럼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것은 정말 하늘에서 펑, 펑, 터지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수제비를 먹는다 식기가 달그락거린다 혀가 데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국물

치아에 달라붙는 반죽 윤기가 흐르는 반죽 맛있지만 맛있다고 할 수는 없다

수제비가 담긴 그릇은 제사상에도 올라간다

영정도 향도 없는 빈 공터에 수제비 한 그릇과 물 한 그릇만이 오른다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렸고 엄마는 동생을 아침부터 혼냈다

동생의 성적은 떨어지고 엄마의 불호령이 눈발을 타고 쏟아졌다

전날 밤에 동생이 수제비를 먹고 싶다고 말했던 기억은 닳고 닳다가 부러졌고

남겨진 자는 떠나간 자에게 평생 먹일 수 없는 수제비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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