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십 대 중반이다
세 번째 일기
나는 이십 대 중반이다. 왠지 참고사항으로 써두어야 할 것 같다.
내가 계획한 죽음까지는 육 년이나 남았다. 일 년에 한 번씩 해외여행을 다녀와도 무려 여섯 개의 국가를 돌아볼 수 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나에게는 일 년에 한 번이나 해외여행을 떠날 돈과 시간이 없다.
부끄럽지만 세계 공용어인 영어 회화 능력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서너 살 아이와도 대화가 통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해외는커녕 국내 여행을 간 날조차 손에 꼽히는 겁쟁이인 내가 혼자 짐가방을 메고 타국으로 떠난다는 것은 아주 커다란 용기, 망설임, 위험 부담,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일이다. 요즘에는 번역기로 전부 소통한다지만 생전 처음 본 타인에게 대뜸 번역기를 내밀면서 언어의 장벽을 넘어 소통하는 일 자체도 내게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나의 인생에 여행이라는 이벤트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기껏해야 가장 가까운 일본 정도가 해외여행의 전부이리라. 일본도 광복절, 삼일절, 한글날 등을 피하려면 날짜 잡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마저도 어디인가. 어차피 유럽이나 호주나 미국 같은 나라는 어차피 무서워서 비행기표도 예매하지 못한다 키도 체격도 작고 성격도 대담하지 못한 토종 한국인이므로 괜히 갔다가 인종차별이나 해코지를 당할까 무서운 탓이다. 나의 고국인 한국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가스라이팅 수준으로 이미지가 만들어졌을 뿐 전 세계가 치켜세울 정도로 치안이 썩 좋은 편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말도 잘 안 통하는 외국은 두말할 것도 없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며 놀라운 자연경관과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들을 감상한다. 내가 저곳에 있으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한다. 사람 사는 곳에 뭐 그리 대단한 차이점이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만히 눈을 감고 조심스럽게 떠올린다. 내가 이곳에서 살아오면서 접했던 모든 것과는 전혀 다른 그것들. 하늘, 구름, 자전거, 도로, 표지판, 나무, 꽃, 건물, 사람, 맛, 냄새, 언어, 소음, 역사, 지붕, 음악, 자동차, 날씨, 습기와 공기, 그 외에 내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하물며 운동화 끝에 차여 저만치 굴러가는 돌멩이의 색과 모양까지도 빠짐없이 생각하고 머릿속에 그려보고는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신다.
찬란한 별하늘과 오로라를 그려보았다. 눈밭을 미끄러지는 펭귄 무리와 북극에서 남극으로 날아가는 철새. 지평선 너머까지 꽉꽉 들어찬 초원과 사막과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거울. 개기 일식과 개기 월식. 그러고 보니 나는 태양이 달에 가려지는 일식과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지는 월식을 구별하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모두 실제로 본 적은 없고 영상으로만 봤는데, 태양을 완전히 가린 달 주변으로 태양빛이 스며 나오는 모습은 아주 신비로웠다. 그 현상을 금환식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며칠 전에 알았다.
해외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를 써볼까. 슬프게도 직장 때문이다. 비록 서른 살에 죽을 예정이라고 해도 죽기 전까지는 안정적인 의식주를 누리며 일상생활을 영위해야 하기에 직장을 그만둘 수 없다. 대표를 포함하여 열세 명의 직원이 다니는 작은 회사. 급여도 복리후생도 다른 중소기업과 비교하면 특색 없이 고만고만하지만 일단 월급이 밀리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줄 만하다. 어떤 날은 정신 줄이 훌러덩 빠질 정도로 바쁘고 어떤 날은 지루할 만큼 한가하다. 이따금 야근하는 날도 있으나 대체로 정시 퇴근이기에 까다롭게 조건을 따지면 중소 규모의 개인 사업체치고는 분명 좋은 편이다.
회사는 짜증과 우울과 스트레스를 시간마다 번갈아 던지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일방적인 폭행을 당한다. 하지만 사회에 내던져진 나에게 일정한 수입과 사회적 위치와 소속감을 안겨주는 유일한 집단. 갈 곳을 잃은 나는 돈도 사회적 위치도 소속감도 포기할 수 없어서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두통과 뻑뻑한 눈 통증과 목, 허리, 골반을 타고 찌릿찌릿 이어지는 뻐근함을 느끼는 시간은 사람의 몸과 정신을 구속하는 그곳을 떠나지 못한 대가였다.
얕은 우울감은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이왕이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존재다. 낮이든 밤이든 집 밖이든 집 안이든 상관없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들이닥치는 불청객이다. 그것은 홍길동이다. 정신과에는 다녀오지 않았다. 얕고 잦은 우울감이 정신적 혹은 정서적 문제라기보다는 나의 타고난 기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지나치는 광경에 사로잡혀 한참을 떠올리다가 이내 눈물을 흘리고, 반대로 남들은 한참 주변을 서성거리며 울고 웃는 장면을 홀로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내 자리를 뜨고 마는 것. 그러고 보니 오늘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걸어가는 중년 남성을 보고는 뒤통수를 망치로 갈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몇 명의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