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넘게 살아오면서 아빠의 대해서 깊이 생각하거나 내 마음을 정제된 글로 옮겨본 적이 없었다. 그냥 아빠였다. 좋을 때는 한 없이 좋다가도 본인이 기분이 상한다거나 아니다 싶은 일이 있을 때면 버럭버럭 큰소리를 질러대는 그냥 그런 아빠였다. 아빠의 장례식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거 같은 착각이 들정도로 아빠에 대한 기억이 또렷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어릴 적에는 항상 아빠 옆에 붙어 잠을 자겠다고 꼭 붙어 있는 껌딱지로 살았다고 한다. 언니와는 3살 터울로 지금과는 다르게 그때는 애교도 많고 종알종알 말하면서 쫓아다니는 막내딸이었으니 늦게 결혼해서 낳은 둘째 딸은 아빠 눈에는 더 귀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외아들에 맏아들인 아빠가 첫째 딸을 낳고 둘째인 나도 아들이 아닌 딸인걸 알았을 때는 분위기 사뭇 달랐던 것 같다. 그 시절 산부인과 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담배만 뻐끔뻐끔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빠는 너무 착잡해서 이를 어쩌나 하는 생각만 했다고 한다.
'난 아들로 태어났어야 하는 건가?'
자라면서 친할머니는 20대 중반이 됐을 때까지도 나에게 '고추 하나 달고 나왔어야지!' 이 이야기를 하셨다. 그때는 이미 성인이 된 후고 어르신들 마음에 아쉬움이 남아서 그러셨겠거니, 불편하거나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리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씀을 그렇게 하셔도 때 되면 크게 용돈 주시고 아들의 딸들이라고 항상 먼저 챙겨 주시는 손주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아빠는 단 한 번도 내게 '아들로 태어났어야지!'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다. 그냥 둘만 낳아서 잘 키우면 되지 그런 마음이었다고 엄마랑 결정을 하시고 더 이상의 자녀는 없다고 선언을 하셨다고 한다.
아빠는 참 가정에 충실하셨다. 가족과 딸 둘 이외에 다른 무엇도 중요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 깐깐한 성격을 참고 산거라고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 성격 다 받아주고 산거는 그나마 가정에 충실하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그거마저 없었으면 살지 못했을 거라고 하신다. 엄마와는 다르게 아빠는 다정하고 섬세했으며 자상한 성격이셨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출근하기 힘들어하면 슬며시 나가서 차를 대기시키고 있다가 출근을 시켜 주시기도 하셨고, 아프다는 말에 근무지 앞으로 죽을 사들고 와서 슬며시 전해주고 가시기도 했다. 그런 아빠는 평소에도 글을 쓰거나 편지를 쓰는 일을 어려워하지 않으셨다. 글 쓰는 일을 부담스럽지 않게 느끼는 성향도 아빠에게서 비롯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학시절 해외로 연수를 잠시 간 적이 있었는데 아빠는 근 1년 동안 이메일과 편지를 써서 보내주셨다. 조금은 무심한 듯 소소한 관심을 비춰주지 않는 엄마와는 다르게 아빠는 노느라 정신없는 딸이 답장 한번 번번이 쓰지 않는데도 보통의 날들의 일을 손수 써서 편지를 써주시고는 했다. 그때는 그냥 무심히 아빠가 편지를 보내셨네 하고는 그냥 넘어가고는 했는데 자식을 키워보니 얼마나 걱정되고 염려되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장례식을 모두 마치고 집안을 정리하다가 엄마가 아빠의 일기장을 발견하셨다. 투병을 하는 와중에 아빠의 병실에서 가을로 물드는 창 밖의 풍경을 보면서 아빠가 넌지시 말씀한 적이 있었다.
"유서 같은 거 말이야. 그런 거 안 썼어 다 필요 없지 뭐 그런 게 뭐 필요해. 가고 나면 의미 없는 거야"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기록하고 정리하기 좋아하는 아빠는 어떤 글이라도 남기시지 않았을까 내심 생각하기는 했었다. 그러다가 방을 정리하던 엄마가 아빠의 투병일기 비슷한 형식의 일기장을 발견했다고 한다. 일기장과 함께 서툰 모습과 표정으로 찍은 영정사진도 함께 있었다. 다행히 가족사진 중에서 밝은 모습으로 더 잘 나온 사진 있어서 이 사진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아픈 후에 찍은 아빠의 모습으로 마지막을 정리하고 보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기장을 읽고는 한동안 무거워진 마음을 다 잡을 수가 없었다.
병명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아빠는 입원과정과 항암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해 두셨다. 그리고 중간중간 자식들과 처에게 너무 짐이 되지 않게 부담스럽지 않게 그렇게 지내다가 떠나고 싶다는 글도 써 두셨다. 하지만 아빠가 엄마께 지나가는 말로 더도 말도 덜도 말고 그냥 5년 정도만 더 살다가 가고 싶다고 그렇게 넌지시 이야기한 적이 있으시다는 걸 알고 있다. 5년이면 괜찮을 거 같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의사가 처음 아빠께 이야기한 시간은 4개월에서 길면 6개월이라고 했다. 그래도 중간에 신약과 항암으로 조금이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연장해서 아빠는 1년 하고도 6개월이라는 기간을 더 함께 하고 가셨다.
아빠에게 그 시간은 긴 시간이었을까? 짧은 시간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빠의 인생에서 자식 둘 다 결혼시키고 손주들이 커가는 일상을 보면서 인생 참 평온하다 생각한 게 아마 딱 10년이었을 것 같다.
마지막에 아빠한테 여쭤보지 못한 게 못내 궁금하기는 했다.
아빠의 인생은 어땠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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