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준 밥도둑은 바로 ‘잡채’. ‘잡채’에서 충분히 탄수화물을 섭취할 수 있건만, 난 잡채에 또 밥을 먹는다. 잡채가 있다면, 밥 한 공기를 뚝딱 먹을 수 있다. 매일 반찬이 달라지는 동네 한식 뷔페에 잡채가 나오는 날엔 밥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우아, 잡채다!” 외치며 한껏 주접을 떨며 들어간다. 이미 여러 번 그 집에서 밥을 먹어 사장님과 안면을 튼 이후로, 사장님께 감사의 마음을 그런 식의 주접으로 보여 드린다. 잡채가 나오는 날엔, 밥양을 조절…하지 않고 원래 먹던 대로 먹고, 잡채도 양껏 먹는다. 행복 그 잡채다.
옛날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난 사람이 참 잡스러운가 봐. 잡채가 그렇게 맛있어.” 드라마 제목도 생각 안 나는데, 유독 그 대사와 그 대사를 찰지게 하던 배우의 너털웃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나도 잡스러운 사람이 맞다. 잡채가 그렇게나 맛있다.
잡채 한 젓가락을 입에 머금으면, 립글로즈 바른 것처럼 입술이 반짝거린다. 당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참기름 덕분이다. 잡채는 볶음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간장조림에 가깝다고 한다. 역시 잡채가 고소하고 짭조름하고 달달하고.. 다 가진 이유가 있었다. 쫄깃쫄깃한 목이버섯 역시 맘에 든다. 당근, 시금치.. 주황색과 초록색이 참으로 잘 어우러진다. 우리 엄마는 가끔 잡채에 어묵을 길게 잘라서 넣어 주셨는데, 잡채에 당면과 채소만 있을 때보다 더욱 풍성한 잡채를 먹을 수 있어 좋았다. 명절 때 엄마 집에 갔다가 우리 집으로 돌아올 때면, 엄마가 명절 음식을 싸 주시는데, 그때 엄마가 싸준 잡채를 냉동실에 얼려 놓고, 조금씩 꺼내서 자연 해동시킨 뒤, 참기름 혹은 들기름을 살짝 두르고 프라이팬에 달달 볶아 먹으면 다시 또 맛이 살아나서 참 좋았다. 그래서 엄마가 싸 주는 내 잡채 봉지는 언니네 것보다 항상 더 컸다.
이렇게 잡채에는 길쭉하게 손질한 거의 모든 재료들이 어울리는 것 같다. 피망, 파프리카, 부추 등등. 잡다한 것들이 다 어우러져서 하나의 음식이 되었기에 이 음식의 이름이 ‘잡채’가 되었을 것이다. 또 잔치를 하는 날에는 잡채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니, 잡채는 흥이 나는 음식임에 분명하다. 여러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곳에 여러 재료가 어우러진 잡채가 제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잡채를 먹으면 잔칫집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나 보다.
그런데 잡채를 먹으려면 단단히 잡도리를 해야 한다. 세상 넋을 놓고 먹다 보면 맛있는 것 천국인 뷔페에 갔다가 잡채만 먹느라 배불러 다른 것은 먹지도 못하고 올 수도 있다. 그래서 대책을 잘 세워 먹어야 하는 것이다. 뷔페 접시에서 잡채가 차지하는 비율이 너무 커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말이다. 우리말 ‘잡도리’는 ‘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이라는 뜻이다. 잡채를 먹을 땐 내 위를 잡도리해야 한다. 적당히 먹어, 다른 것도 먹어… 이렇게. 더 잘 먹기 위해 잡도리를 해야 한다.
그런데 잡채는 또 다른 의미로 잡도리를 해야 하기도 한다. 잡채는 한 접시당 칼로리가 높진 않지만, ‘나’라는 아이는 한 접시만 먹지 않는 게 문제고, 잡채에는 염분이 많아, 너무 많이 먹으면 건강에 안 좋기 때문이다. ‘잡도리’는 좀 강한 뜻도 있다. ‘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단속하는 일, 그리고 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 족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도 밥집에서 잡채를 먹다가 ‘잡도리’라는 단어를 떠올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잡채를 강한 의미로 잡도리하고 싶진 않다. 후루룩 짭짭 잡채를 먹는 일은 요란스럽게 족칠 일은 아니다. 잡채를 어떻게 먹으면 더 맛있을지 함께 고민해 봐야 할 일이다. 사회적 논의(ㅋㅋ)가 필요한 일이지, 살찐다고 스트레스 줄 일이 아니다. “잡채 그만 먹어”라고 누군가 잡소리 섞인 잡도리를 하면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고 한 젓가락 먹음직스럽게 먹어볼 작정이다. 누군가의 잡도리에 기분 잡치지 말고, 잡채 한 젓가락에 시름을 날려버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