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이팔 Mar 07. 2020

첫사랑 (上)

그때 나를 덮쳐온 게 파도였는지 네 웃음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주로 즐겨보는 자기계발서들은 모두 다른 말을 하는 듯 보였지만, 근원을 놓고 보면 작가 특유의 색으로 조금씩만 바꿔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 한들 그 또한 맞는 말 대잔치였기 때문에 대부분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기곤 했다.


 딱 한 마디. 수많은 번지르르한 말 중 가끔 '어떤 일이든 끝맺음을 잘 지어야 한다.' 말을 마주치면 엄지 끝에 닿은 종이가 눅눅해질 때까지 한참을 붙잡혀 있었다. 그리고 책을 쓸 정도면 작가가 나보다는 많이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다.


저는 시작 지점이 어디인지 모르는 일이 매우 많은데, 그럼 끝은 그 지점이 보일까요?

감정의 끝맺음은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잘 지었다고 할 수 있나요?


눈으로 열심히 글자를 째려본다 해도 책 너머에 있는 작가는 답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접 작가에게 이메일을 보내보거나 SNS로 연락을 취하진 못했다. 그럼 '어떤 일에 대한 시작 지점을 모르겠나요?' 또는 '어떠한 감정을 끝맺고 싶나요?'라는 질문이 날아올 테니까.


애초에 속 얘기를 잘하지 않는 나에게 모르는 사람과 깊은 얘기를 나누라는 건, 벌거벗고 광장 한가운데 서 있으라는 격이었다. 용기 내어 벌거벗고 광장에 섰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으로 똘똘 뭉친 또 다른 내가 벌거벗은 날 공연음란죄로 끌고 갈 게 뻔했다. 벌금은 가끔 부끄럽게 오늘 일 떠올리기 100번 정도로 마무리되겠지.


짧디짧은 삶을 돌아보면 내 질문에 해당하는 일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애초에 인생은 이리도 역설의 굴레 속에 있다는 걸 어른들은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을까.  사춘기를 넘기고 있는 청소년의 고민 따위를 품기엔 어른도 제 세상을 살기 바쁜 탓도 있을 터였다. 그 실례로 수학 선생님은 15분 전부터 열심히 칠판에 수식을 써 내리며 지식의 나눔을 실천하고 계셨다.


엊그제 운 좋게 창가 자리에 배정되었다. 덕분에 수업 도중에 슬그머니 창밖을 바라보는 일탈을 만끽했다.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하늘의 고요함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몇 개월 전부터 하루에도 수십 번 뒤집히는 감정에 진이 다 빠졌다. 애써 긍정 회로를 돌려 이 소란스러움이 걷히면, 나도 저 하늘처럼 고요할 날이 올 거라 믿으며 다시 칠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맨 앞줄 너와 눈이 마주쳤다. 저도 뒤에 있는 나를 보며 딴짓을 하고 있으면서, 창밖을 본 나를 나무라는 눈짓을 꾸물꾸물 보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실실 웃으며 다시 칠판을 돌렸을 때, 나도 덩달아 칠판에 두 눈을 칼같이 고정했다.


칠판에 고정한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이 소리를 내지르며 사지 끝까지 널을 뛰었다. 제발 조용히 있을 수 없냐고 다그치는 주인의 목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웃는 얼굴 하나에 얼굴이 벌게지고 손에 땀이 났다. 고요 속에 소란스러움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수업 타종 소리와 함께 부리나케 책상에 엎드렸다. 수업 끝나자마자 벌써 자냐며 낄낄대는 친구들의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지금 그깟 놀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엎드린 채로 볼에 손을 살짝 올려보았다. 아직도 얼굴은 뜨끈뜨끈 열이 났다. 아까 너와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뇌리를 스쳤던 직감이 맞았다.


오늘도 망했다. 







죽마고우. 몇 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연이와 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사자성어였다. 어머니끼리 산후조리원 동기였으니 기억도 나지 않을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온 건 당연했다. 미취학 시절 나와 서연이가 왜 우리는 가족인데 다른 집에서 사냐고 할 정도였다. 피하나 섞이지 않은 두 집안이 아이를 공동으로 키우다시피 했다.


굳이 두 집안의 다른 점을 꼬집자면 나는 2살 많은 누나가 있었고, 서연이는 8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는 정도뿐이었다. 우리 둘을 연결고리로 두 가족이 같은 여행, 같은 졸업식, 같은 입학식에 참석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 이외에 가족의 경조사나 사소한 심부름 또한 마찬가지였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서연이 어머니가 죽을 만큼 부끄러운 포경수술 보호자로 대동했었고, 나는 생리통이 심한 누나와 서연이의 생리대, 핫팩, 초콜릿 등을 퍼 나르기도 했다.


학교에서 서로의 집안일을 서슴없이 주고받을 때, 새로 사귄 친구들이 꼭 한 번씩은 물어보는 질문은 매번 같았다.


너희 이란성쌍둥이야? 근데 왜 성은 달라?

너희 같은 집에 살아? 근데 왜 맨날 같이 다녀?

야. 너 쟤랑 사귀어? 근데 왜 서로 그렇게 잘 알아?


학년이 바뀌고 새로이 반이 배정되면, 서연이와 나는 한 달 정도 같은 질문에 계속 시달리는 고통을 겪었다. 중학교 즈음에는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질문을 무시한 적도 종종 있었다. 대답하지 않는 질문에 1~2주 정도 놀리며 킬킬대는 놀림도 잠시였다. 그 이상 우리 둘을 바라보면 딱 호적 메이트 그 이상이 아니었기에, 봄바람 타고 온 아지랑이와 함께 웃음소리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서연이와 나는 어떻게 같이 다니면 '사귄다'라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야. 우리가 쟤네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그럼 당연하지. 하굣길에 사이좋게 떡꼬치를 먹으며 뒤늦은 후일담을 주고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 나도 평생 그럴 줄 알았다. 


혼자만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한 건 2개월 전, 어김없이 우리 가족과 서연이네 가족이 같이 여름휴가를 갔을 때였다. 이제 막 대학 새내기가 된 누나는 친구와 여름방학을 즐긴다며 해외로 나간 탓에 짐을 옮길 인력이 하나 줄었다. 게다가 하필 아버지가 뒤늦은 캠핑 바람이 드셨다. 덕분에 팔자에도 없었던 캠핑 도구를 두 차에 한가득 싣고 떠난 여름휴가였다. 서연이와 나만 새로이 늘어난 짐을 옮기느라 죽어라 고생했었다.


"야. 나 지금 온몸이 땀으로 젖었어."

"나도 마찬가지야. 왜 우리는 바다를 코앞에 두고 땀만 뒤집어써야 하냐."

"그럼 이따 텐트 다 피고 엄마, 아빠 고기 구울 준비하는 동안 잽싸게 담그고 오자."

"어. 이것만 피고 당장 가자. 아! 이건 또 왜 이리 무거워!" 


목표가 생기니 혈기 왕성한 고등학생 둘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텐트와 의자, 그늘막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들어갔던 걸스카우트, 보이스카우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약 15분 뒤, 우리는 시원한 해송 바람이 부는 오토캠핑장을 벗어나 바로 앞에 펼쳐진 바다로 냅다 뛰어들었다. 한여름의 바다는 오묘한 매력이 있었다. 손끝으로 만지는 바다는 미지근했고, 명치께로 느끼는 바다는 적당히 시원했다. 시원한 물살에 머릿속까지 개운하게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서로 바쁘게 몸 곳곳에 피어난 짠 내를 또 다른 짠물로 지워냈다. 어느새 각자의 머리엔 물미역이 한 움큼 자라났다. 볼 여기저기에 붙은 물미역을 해치니 말간 민낯으로 따가운 햇볕이 쏟아졌다. 사지를 조금씩 움직이며 유유히 물 여기저기를 쏘다니는데, 어느새 가까이 온 서연이 장난기를 같이 몰고 왔다.


"은상아. 가위바위보 해서 이긴 사람이 튜브 위에 앉은 사람 밀치자."

"근데 우리 튜브 있어?"

"없어. 그래서 차연이 꺼 가져왔어."

"야. 진서연. 너는 초등학생 동생 걸 뺏어오냐. 진짜 잘했다. 안 내면 진 거 가위바위보!"


제 꾀에 제가 넘어가듯 원래 내기를 먼저 얘기한 사람이 꼭 걸린다는 얘기가 있다. 자신 있게 주먹을 낸 서연이는 내가 낸 보자기를 보며 망연자실했다. 연이어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며 야무지게 쥔 주먹으로 바닷물을 내리쳤다.


"하은상. 이거 무효야. 너 늦게 냈어."

"수작 부리지 말고 얼른 튜브 위에 앉자. 저만치 나가서 앉으면 내가 친히 밀어줄게."

"진짜 네가 늦게 냈다니까?"

"잔말 말고 튜브 내놔."


나는 서연이가 더 말을 보태기 전에 튜브를 냉큼 뺏어 들고 모래사장 쪽으로 향했다. 찰박대는 얕은 파도 소리 사이사이에 구시렁구시렁 대는 서연이의 투덜거림은 덤이었다. 한 손에 가벼이 쥐어지는 초등학생용 튜브는 고등학생이 앉기엔 작디작았다. 하지만 튜브를 가지고 놀겠다는 의지의 한국인이 못 할 일은 없었다. 나는 겨우겨우 엉덩이를 밀어 넣은 서연이를 튜브 위에 실은 채 콧노래를 부르며 친히 바다 펜스 근처까지 물놀이를 시켜주었다.


"이렇게 친절한 친구가 어디 있냐. 튜브 위에 친구 앉혀놓고 바다 구경도 시켜주고."

"너 지금 멀리서 보면 꼭 사이코패스 같을걸. 이제 웃으면서 튜브 뒤집을 거잖아."

"응."

"밀려면 빨리 밀지 왜 굳이 펜스 근처까지 와?"

"네가 바다 깊은 곳까지 구경했으면 하는 마음이지. 잘 가."


나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튜브를 끝을 잡고 잽싸기 뒤집었다. 작은 튜브는 퐁! 하고 튀어 올랐고 서연이는 그대로 바닷속으로 고꾸라져 한참을 허우적거렸다. 낄낄거리며 한참을 비웃고 있으니 더 불어난 물미역을 얹은 서연이가 슬그머니 주먹을 내밀었다. 다시 가위바위보가 이어졌다. 진서연의 완패였다.






"이게 진짜 마지막이야. 안 지겨워?"

"계속 빠진 건 난데 뭐가 지겨워. 알았어. 진짜 마지막이라니까?"

"…. 안 내면 진 거 가위바위보."


서연이는 연거푸 네 번이나 물에 빠져놓고, 뻔뻔하게 이번에는 진짜 마지막이야를 두 번째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다섯 번째 만에 내가 가위바위보에서 졌다. 이번에는 내가 져서 천만다행이었다. 빨리 바다에 엎어지고 끝낼 심산으로 자진해서 튜브를 끌고 물 밖으로 나갔다. 


어렸을 때만 해도 서연이가 나보다 훨씬 컸지만, 그 차이는 이미 역전된 지 오래였다. 중학교 졸업할 즈음에는 그래도 반 뼘 정도 차이가 났었는데, 지금은 내 손으로도 한 뼘 이상 차이 났다. 서로 그 차이를 잊다가 종종 같은 물건을 사용하는 순간이 오면 빠르게 현실감을 되찾았다. 서연이가 꾸역꾸역 올라탄 어린이용 튜브가 날 제대로 부양할 리 없다는 걸 우리 둘 다 간과했다. 간신히 엉덩이를 걸쳐 물가로 내딛기 시작하면, 튜브는 익사 직전 상태로 뒤뚱대다가 나를 퉤 뱉어내기를 반복했다.


"아! 너 왜 덩치가 이 모양이야!"

"내가 크고 싶어서 컸냐. 튜브가 너무 작은 걸 어떻게 해."

"안돼. 무르기 없어. 어떻게든 올라가 봐.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다시 올라가."

“응.”


네 번의 고배를 마신 서연이는 굉장한 눈빛으로 작은 튜브와 큰 덩치인 나를 번갈아 째려보았다. 평생에 걸친 경험을 통해 저렇게 형형한 눈빛을 띠는 날에 서연이를 잘못 건드리면 나만 힘들다는 걸 익히 잘 알았다. 아마 저 눈을 보면 코끼리도 스스로 냉장고에 몸을 꾸역꾸역 집어넣었을 거라 확신하며, 다시 자그만 튜브 위에서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시도했다.


몇 번을 더 도전한 끝에 나를 띄운 튜브가 펜스 근처까지 왔다. 멀리서 보면 튜브는 온데간데없고 사람 혼자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형상처럼 보일 정도로 튜브는 완전히 잠긴 상태였다. 짠 바닷물에 팔이 간지러워 살짝 긁으려고 몸을 움직여도 튜브는 꼬륵꼬륵 소리를 내며 물밑에서 아우성을 쳤다. 


서연이는 펜스 근처까지 날 밀고 온 자체가 감동한 듯했다. 매우 기쁜 표정을 지으며 내 팔을 잡던 손을 떼고 조금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하은상. 마지막으로 할 말 있나."

"없어. 빨리 밀기나 해."

"너를 밀 수 있어 기쁜 내 마음을 아니. 잘 가."


마지막 말을 마치자마자 서연이는 힘겹게 튜브를 뒤집었다. 내가 어느 정도 물속에 가라앉아 있었음에도 이전보다 훨씬 큰 물장구가 튀어 올랐다. 미리 숨을 참고 있었지만, 코나 귀로 물이 밀려 들어오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질끈 감은 눈으로 물살을 가르며 해수면 위로 고개를 디밀었다. 답답했던 숨이 터짐과 동시에 먹먹한 귀와 코에서 뜨끈한 물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세게 머리카락과 얼굴을 쓸어내리며 짠 내를 급히 제거했다. 아직 조금 따가운 눈을 비비며 튜브를 잡고 있을 서연이를 바라보았다.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다. 


처음에는 서연이 뒤에 보이던 노을이 너무 예뻐서, 혹은 바닷물의 짠맛에 취해서 잘못 본 거라 우겼었다. 여름휴가의 기억은 드문드문 끊기거나 블러 처리를 한 것처럼 뿌옜지만, 그 웃음만큼은 지금도 영화관에 걸린 큰 포스터처럼 또렷하게 잔상이 남아있다. 


연거푸 고배를 마신 서연이는 참으로 해사하게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질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지겹도록 많이 봤는데. 왜일까. 평상시 보던 서연이가 아니었다. 따가운 눈가를 다시 몇 번 비비며 바라볼수록 그 정도는 더 심각해졌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스멀스멀 목젖까지 올라왔다.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면, 치기 어린 감정은 더 꾸물꾸물 올라왔다. 믿을 수 없는 네 말간 웃음과 내 감정에 여지없이 휘둘렸다. 그리고는 서연이를 한참 멍하니 바라보았다. 


첨예한 감정의 대립

귀 끝이 아릴 정도의 아찔한 소름

이어 가슴께까지 차오른 짠 울렁임까지

그때 나를 덮쳐온 게 파도였는지 네 웃음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유 없는 뱃멀미를 하는 기분이었다.


아, 첫사랑이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