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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Apr 11. 2021

첫사랑 (下)

네가 제일 어려워.



서연이는 내가 한참을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게 멋쩍었는지, 등을 살짝 후려치며 '나 약속은 지켜. 이제 밥 먹으러 가자.'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유유히 튜브를 앞세워 나에게서 멀어졌다. 나는 어물쩍 대답하며 뒤를 따라 다시 텐트로 향했지만, 내 이성은 아직도 바다 어딘가에 떨어져 찾지 못한 상태였다. 내 이성은 튜브에서 떨어질 때 홀랑 바닷속에 빠뜨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나사 빠진 표정과 몽글몽글한 감정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여행 내내 가족들이 아까 텐트 칠 때 더위 먹은 게 아니냐고 걱정할 정도로 혼이 나가 있었다. 혼자 휘몰아치는 감정과 싸우느라 다른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만약 잘못해서 그 감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대한 핵폭탄이 두 집안에 떨어지게 될 터였다. 나는 두 가족의 화목함을 지키기 위해 얼떨결에 튀어 오른 핵폭탄을 끌어안고 홀로 끙끙댔다.








그로부터 3개월, 아직도 폭탄은 처리하지 못했다. 핵폭탄을 끌어안고 있으면 가끔 쓸데없는 환상을 심어주곤 했다. 그리고 꿈에서 네가 나와 날 안아주는 날이면 일어나 어김없이 엉엉 울었다. 해사한 품에 안기는 순간마다 가슴은 곤두박질쳤다. 


'아, 꿈이구나. 네가 이렇게 날 안아줄 리가 없는데.' 


눈을 뜨면 네가 보이지 않을 걸 알기에 눈을 감고 너를 보았다. 너는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참 밝게 웃었다. 그렇게 꼼짝없이 핵폭탄이 심은 꿈에 놀아나는 날이 늘어갔다.


홀로 방 안에 있을 때면 스스로 감정의 갑질에 휘둘렸다. 때때로 나에게 되묻곤 했다. 과연 이걸 갑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애초에 시작도 못 해본 관계이거니와, 상대방은 계약 자리가 만들어진 줄조차 몰랐다. 항상 계약서 상대방 이름란에 혼자 네 이름을 연필로 썼다가 눈물로 벅벅 지웠다. 연필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게 지워지는 공란이 사무치는 날엔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다 네가 또 꿈속에서 날 안아줄까 봐. 


때로는 그날 여름 바다를 회상하며 그때 너를 쳐다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괴롭지 않을 터라며 현실을 부정했다. 그러다가도 해사한 웃음을 떠올리면 속도 없이 실실 웃었다. 울고 웃기를 수없이 반복하니 사람이 미쳐가는 과정 한복판에 놓인 듯했다. 어디에라도 첫사랑은 다 이리도 지랄맞은 건지 묻고 싶었다. 어이없게 그 생각 속에서도 서연이가 튀어나왔다. 살다가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항상 서연이에게 물어보곤 했던 과거의 내가 싫었다.







겉으론 모두에게 너그럽고 풍요로워 보이는 추석이 지나갔다. 명절 음식에 이골이 난 두 어머니는 서연이네 집에 모여 푸짐하게 배달 음식을 시키셨다. 오랜만에 여덟 명 모두가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른들의 허락하에 서연이와 나도 맥주 한 잔씩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어린 간은 아직 술을 해독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 게 분명했다. 겨우 맥주 한 잔에 기분이 붕 뜨고 헤실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모두가 웃는 낯으로 추석을 마무리 지을 즈음, 기분이 거하게 올라가신 서연이네 아버지가 큰 목소리를 내었다.


“우리 서연이! 저렇게 예쁘고 착한 내 딸을 누구한테 보내! 난 못 보내!”

“이이가. 한참도 더 남은 일을 왜 자꾸 그래요.”

“너어. 서연이. 저번에 아빠가 봤어! 집 앞에서 어떤 시커먼 놈이랑 걷던 거! 우리 서연이 남자 친구 생긴 거야아?”

“아유. 이이가 오늘따라 왜 이래. 애가 남자 친구가 있을 수도 있지!”

“안 돼! 우리 서연이 누가아-”


서연이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정신이 반짝 돌아왔다. 취한 정신으로 내뱉은 말에 괜히 다른 시커먼 놈이 뜨끔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미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연거푸 마시던 콜라를 내려놓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여름 바다의 짠 내가 다시 올라오는 듯했다.


“아빠! 내가 무슨 남자 친구야. 나 남자 친구 없어.”

“쓰읍. 엄마가 보기에도 엄청 다정해 보이던데- 중학교 때 만났던 그 친구 아냐?”

“아냐! 내가 걔를 왜 다시 만나. 안 만나!”

“그래. 우리 서연이 의대 들어가서 의사 남친 데려와.”

“엄마. 제발.”


모녀는 비슷한 얼굴로 판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사이에서 나는 한 번 더 무너지며, 꼭 쥐었던 물 잔을 내려놓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오며 각자 담임선생님께 제출했던 기록지가 떠올랐다. 서연이는 의대에 들어가길 원했고 나는 사관학교에 들어가길 원했다. 같은 이과에서 완전히 다른 길을 택한 걸 발견한 당시에는 서로 신기하다며 키득키득 웃고 넘겼었다. 지금은 그 웃음이 비수로 돌아와 폐 어딘가에 푹 박혔다. 


의사 남친. 참으로 번지르르한 말에 내 꿈이 한껏 쪼그라들었다. 나름 원대한 포부를 품고 지원하는 사관학교가 갑자기 잘못된 선택지 같아 보였다. 그렇다고 의대로 전향하기엔 너무 뜻이 없었다. 서연이 어머니가 심심풀이로 던진 돌멩이 하나에 시커먼 개구리 하나가 자진해서 돌을 맞았다. 덩치보다 한참 작은 돌멩이 하나가 머리 위로 딱콩 떨어졌다. 스스로 뛰어들어 맞은 돌팔매질 한 방에 괜한 서러움이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내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가르며 벌떡 일어나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술에 취해 먼저 집에 들어간다며 후다닥 핸드폰만 챙겨 나왔다. 짝이 안 맞는 슬리퍼를 억지로 구겨 신고 3분 남짓한 집으로 빠르게 발을 놀렸다. 누가 봐도 취한 발걸음은 아니었다. 나는 괜한 맥주 한 잔에 취해 감정이 북받치는 거라 자신을 다독였다. 괜히 청승맞게 쏟아지는 눈물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쏟아지는 눈물에 이성이 떠내려갈 즈음. 서연이가 뒤에서 나를 붙잡았다.


“야. 너는 취했다는 애가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빨라. 근데 너 울어?”

“안 울어.”

“이렇게 눈물 바람을 하고 무슨….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킁. 없어.”

“길 한복판에서 코나 먹고 말이야.”


서연이의 자그마한 손이 내 양팔에 덧대어졌다. 떼어내면 그만인 작은 손을 감히 뿌리치지 못했다. 이 작은 손 하나 뿌리치지 못하는 내가 더 서러웠다. 반대로는 그 손에 잡힌 양팔이 참으로 부러웠다. 


제일 못난 모습을 보이기 싫은 사람 앞에서 제일 못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도 차마 맞잡을 수 없는 손이 아득해 참았던 둑이 와르르 무너졌다. 큰 소리를 내어 엉엉 우는 내 모습에 당황하던 너는 손을 위로 뻗어 팔을 잡았던 손으로 이제는 내 머리통을 감싸 주었다. 어렸을 적 다른 애한테 맞고 오면 항상 너는 이렇게 내 머리통을 안아 주곤 했었다. 그때와 똑같은 손길이 머리에 여러 번 내려앉았다. 그때와는 다른 마음을 가진 나에게 쏟아지는 똑같은 손길은 더 큰 미안함을 불러일으켰다.


“왜? 공부가 잘 안 돼? 뭐가 어려워?”

네가 제일 어려워.

“아니면 누가 괴롭혔어?! 학교에서 누가 괴롭혀?”

네가 제일 괴로워.

“아유. 울긴 왜 울어. 속상한 일 있어?”

네가 너무 좋아서 속상해.


작은 키 아래 구겨진 큰 덩치가 엉엉 울며 눈물방울과 함께 속마음을 쏟아 냈다. 네 말에 되뇌는 내 대답은 그 누구도 들어선 안 됐다. 특히 네가 듣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그저 끅끅 숨넘어가는 소리만 내었다. 오늘도 핵폭탄을 끌어안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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