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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Apr 04. 2020

부디 내게 거짓말을 해 줘 (上)

나는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




꽃샘추위를 머금은 햇볕은 참으로 따사로우면서 서늘했다. 장소를 가리지 않는 빛이 조용한 산기슭에 내려앉아 신선놀음했다. 하지만 해가 아무리 내리비춘다 한들 그 와중에도 음지는 존재했다. 


파릇파릇하게 돋아나고 있는 잡초 사이에서 무언가 스르륵 미끄러지는 소리를 냈다. 물소리 마냥 끊임없이 이어진 소리는 눈앞의 사냥감 냄새를 맡고 바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여러 번 혀를 날름거렸다. 생각보다 먹잇감이 가까이 있음을 알아채고 더욱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윽고 포식자의 냄새를 맡은 작은 쥐가 꼬리를 굳히고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귀를 쫑긋 세웠다. 위험이 제 등 뒤에서 느껴짐을 앎과 동시에 물소리가 빠르게 쥐 쪽으로 내달렸다. 


덥석. 

쥐가 몇 발자국 달리지 못하고 물소리에게 몸통의 반을 내주었다. 뱀은 반 정도 물은 쥐를 놓지 않고 점점 더 세게 물고 숨통을 조였다. 욕심스레 꾸역꾸역 쥐를 목구멍 너머로 넘긴 뱀은 그제야 다시 느긋한 물소리를 내며 유유히 습한 음지로 들어섰다.


오늘은 운이 좋아 쥐 한 마리를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2주 동안 굶다가 겨우 작은 쥐 하나 먹은 뱀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다시 습한 풀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근처에 어미 쥐가 있지 않을까 눈을 번뜩였다.


혀를 날름거려 냄새를 맡다 보니, 찾는 쥐 냄새는 없고 별안간 희한한 냄새가 났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냄새였지만,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있을까 할 정도로 탐이 나는 향이었다. 먹이를 제대로 먹지 못한 뱀에게는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뱀이 고개를 조금 쳐들고 유혹에 조금 더 다가갔다. 어느 나무 밑동 아래에 다다랐을 때 그 향기가 한 나무에 열린 열매들에게서 새어 나오고 있음을 알아챘다. 뱀은 쥐를 사냥하듯 유유히 나무 기둥을 올라타기 시작했다. 갈색 비늘이 날을 바짝 누이고 나무와 한 몸이 된 듯했다. 스스로 물길을 내어 꾸물꾸물 나무 위로 올라가니 어느새 유혹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뱀이 쥐를 잡아먹을 때보다 더 입을 크게 쩌억 벌리고 열매를 크게 물었다. 입은 한계치가 없다는 걸 자랑하듯 열매를 따라 점점 더 벌어졌다. 작은 쥐보다 조금 힘들게 목구멍 너머로 열매를 넘기니 숨을 쉴 때마다 콧속에서 유혹적인 향이 뿜어져 나왔다.


큰 열매를 먹었으니 앞으로 3주 이상은 끄떡없을 터였다. 그제야 나른한 기분에 취한 뱀은 나뭇가지에 몸을 둘둘 말고 이 배부름을 조금이라도 즐기기로 했다. 나무 위에서 쉴 준비를 마친 뱀이 마지막으로 머리를 나뭇가지 위에 턱 하니 얹었다. 제 머리 조금 앞에 내려앉은 햇볕이 따뜻한 냄새를 마구 내뿜었다. 오래간만에 여러모로 따뜻한 뱀은 노곤하게 한낮의 그늘을 즐겼다.


얼마나 시작이 지났을까. 느긋하게 휴식을 즐기던 뱀 허리에 별안간 매질이 이어졌다.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고 화들짝 놀란 뱀이 온몸을 굳혔다. 끊기지 않을 것 같던 매질이 잠시 멈췄다. 뱀은 재빨리 나무에서 내려왔다. 제가 아까 잡아먹은 쥐보다 더 빠르게 물길을 그리려는 찰나, 꼬리가 콱 밟혀 움직이질 않았다. 눈물 나지 않는 저가 눈물이 날 만큼 아팠다.


“감히 뱀 주제에 신선의 열매를 탐하였구나.”


어쩐지 냄새가 너무 좋더라니 그게 신선의 것이었나 보다. 뱀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신선 열매라고 표시라도 해놓았다면 그 나무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터였다. 신선이라면 저 하늘에만 있는 줄 알았지 제가 사는 산속 어딘가에 신선 나무가 있는지 누가 알았겠는가. 사악- 거리며 억울함을 호소해봤지만, 신선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오히려 거짓말이라 치부했다.


“네놈이 욕심 때문에 거짓을 고하는구나. 지상의 열매 중에 이렇게 좋은 냄새를 풍기는 게 어디 있겠느냐.”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뱀은 입을 쩍 벌리고 삭삭- 거리던 소리를 멈추었다. 그럼 뭐 어쩌란 말인가. 이미 먹었는데. 그리고 신선은 발이 두 개라 발 하나쯤 밟아도 절뚝거리며 걸을 수 있겠지만, 뱀은 꼬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다치면 움직이기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열매를 먹었다고 화를 내도 좋으니 밟은 꼬리는 좀 놔줬으면 했다. 그러나 화가 뻗칠 대로 뻗친 신선은 계속 꼬리를 밟은 채 뱀을 노려보기만 했다.


“신선의 열매를 탐하는 것도 모자라 거짓을 고하다니. 내 그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하겠다.”


꼬리를 밟힌 채 안절부절못하던 뱀이 신선의 손놀림 한 번에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몸이 벌벌 떨릴 정도로 몹시 추웠다. 아, 어느새 밤이 되었나 보다. 밤에는 온도가 내려가니 따뜻한 나뭇잎 사이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몸이 꿈쩍하질 않았다. 아까 신선이 밟은 꼬리 부근 척추가 고장 난 게 분명했다. 


뱀은 이렇게 신선 열매 하나 먹었다고 죽나 싶었다. 되려 몸 어딘가에 따뜻한 기운이 여기저기 덧붙기 시작했다. 쥐들이 내가 죽은 줄 알고 뜯어먹으려 몰려든 걸까? 몸이 뜯길까 무서운 와중에도 턱턱 잘도 달라붙는 따뜻한 온기가 속도 없이 좋았다. 땅이 제각기 다르게 울리는 소리가 더 자주 들더니 몸이 붕 뜨였다. 


아, 쥐인 줄 알았더니 뱀 사냥꾼이었나. 옆 산 중턱 뱀에게서 사람이 뱀을 먹는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잡혀갈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의식이 희미한 와중에도 뱀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정신을 놓기 전, 열매 하나에 치사하게 제 꼬리를 못 쓰게 만든 신선을 매우 욕하며 머나먼 무의식으로 떨어졌다.








“아가. 정신이 드는겨? 아유. 여기 좀 와바요! 아-가 눈을 떴어!”

“아-가 눈을 떴어?! 어디 좀 봐봐.”


뱀은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눈을 떠? 이 사람들은 뭐야? 뱀 사냥꾼인가? 소리라는 게 이렇게 잘 들린다고? 뱀은 여태껏 혓바닥이나 땅의 진동으로 다른 사물이나 먹잇감 움직임을 감지하는 게 다였다. 청각기관은 제대로 사용되지 않은 지 오래였는데, 지금은 제 앞에 보이는 사람의 목소리가 똑똑히 잘 들렸다. 게다가 저는 눈꺼풀이 없는 뱀이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뭐야. 눈이 저절로 닫혔다 열렸다 하네. 이게 무슨 일이지? 


“야아-. 내 말 들려? 말은 할 줄 알어?”

“…….”

“뭐여. 말을 못 하는 겨?”


뭐라는 거야? 뱀은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뱀의 말이랄 게 무어 있을까. 뱀은 말을 고사하고 혓바닥을 주로 먹이 찾거나 다른 포식자의 위험을 피할 때 쓰는 동물이었다. 꾀죄죄한 여인네가 뱀의 몸 어딘가를 덥석 잡고 흔들었다. 그러자 밖에서 큼지막한 사내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겨우 정신을 차린 뱀의 머리 근처에 털석 앉았다. 그가 바닥에 앉는 소리에 뱀은 머릿속이 다 울릴 지경이었다.


“아유. 야가 말을 못 허네…. 그래서 산에 버려진 겨? 너 어디 살았던 겨."

“아가. 말 못 해? 아아- 해봐.”

“…. 아아!”

“어유. 말할 줄 아네!”

“…?”


인간의 입 모양을 따라 입을 놀려 보아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뱀은 자신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동물임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뱀은 좁은 방안에 자꾸 사람이 몰려드니 슬슬 겁이 났다. 저러다 별안간 저를 팔팔 끓는 물에 던져 넣을까 싶어 얼른 달아나야겠다는 본능뿐이었다. 겁을 주려는 목적으로 사악- 거렸는데 목구멍에서 저들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 이제 뱀은 정말 혼란스러웠다. 두 눈도 여전히 깜박이고 있었다.


“아야. 이름은 있어?”

“… 으?”

“으. 말고 이-름!”

“……?”


뱀은 다시 인간의 입 모양을 보고 따라 해보려 했지만, 발음이 제대로 나질 않았다. 이-으름이 뭘 말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제 목소리에서 소리라는 게 분명히 났다. 목구멍의 떨림이 제대로 머릿골을 따라 울렸다. 뭔진 모르겠으나 여전히 도망가야 산다는 뱀의 본능이 앞섰다. 우선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전해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옆에서 저에게 바라는 게 매우 많은 부부를 두고 제 다친 꼬리 쪽을 살펴보았다. 꼬리가 없고 다리 두 짝이 있었다. 저거 인간 다리인데? 그 위에는 손이 붙어 있었고, 그걸 바라보는 제 눈은 여전히 무의식에 깜박이길 반복했다. 뱀은 그제야 제가 까무룩 정신을 잃기 전, 신선이 했던 경고가 생각이 났다.


‘일주일의 말미를 주겠다. 너는 내게 거짓말을 한 죄로 인간 모습으로 저 아랫마을에 내려가 거짓말로만 먹고살게 될 것이다. 인간의 거짓말 한마디에 딱 하루를 더 살게 되겠지만, 인간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넌 일주일 뒤에 죽게 되겠지. 내가 지상 여기저기를 다녀보니 저 아랫마을 사람들이 참으로 착하더구나. 일주일 뒤, 네가 죽는 모습을 보러 친히 마중 나가마.’


뱀은 매우 망했다는 본능에 휩싸였다. 그리고 옆에서 저를 데리어 키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순박한 부부를 바라보았다.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아니, 심지어 뱀일지도 모르는 아이를 키우려 하다니. 뱀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순진한 부부 옆에서 일주일 뒤에 죽게 될 제 운명이 여실히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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