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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Apr 18. 2020

노란 휴일

당신과 같이 보내는 이 휴일에는



흙먼지를 품은 사륜차가 끊임없이 이어진 길을 내달렸다. 약간 열어놓은 창문 틈에서는 한적한 산 중턱의 풀 내음이 계속 공급되었다. 인기척 하나 없는 운전이 외로울까 간혹 길쭉한 나뭇가지가 만나서 반갑다며 차체와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했다. 반가운 자연의 인사 속에 비포장도로는 넓어졌다 좁아지길 반복했다. 산은 큼지막한 사륜차가 아슬아슬하게 헤쳐 지나갈 정도로만 길을 내어주었다. 고마운 마음을 간직한 채 차는 목적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산속을 내달린 지 몇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차가 작고 빨간 대문 앞에 당도했다. 긴 시간 동안 쉼 없이 움직였던 엔진이 드디어 휴식을 맞이했다. 노란 헤드라이트마저 점등되자 운전석에서 빠져나온 은영이 흙길에 발을 내디뎠다. 


뒷자리에서 짐을 꺼내려 걸음을 옮기자 묵직한 운동화 밑바닥에 드문드문 자갈들이 밟혔다. 뒤이어 은영은 조금 더 잘그락대는 소리와 함께 노란 대문 한가운데 놓인 빗장을 풀어헤쳤다. 대문이 녹슨 쇳소리를 내며 외부인이 당도했음을 널리 알렸다. 빗장을 헤친 채 잠시 머뭇대던 은영이 백팩과 쇼핑백 꾸러미를 다시 고쳐 쥐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몇 분쯤 언덕길을 더 올라가니 기다란 빨간 지붕이 빼꼼 머리를 들이밀었다. 세월에 흔적과 때가 낀 빨간 지붕은 왠지 모르게 볼 때마다 아늑한 느낌을 심어주었다. 낮은 언덕을 거의 다 올라오자 지붕 밑 하얀 벽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벽 한구석에는 흙이 잔뜩 묻은 농기구가 벽에 기대 삐딱하게 서 있었고, 그 밑에는 작은 플라스틱 화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은영은 집주인의 인기척을 찾으려 애썼다. 쇼핑백 꾸러미를 농기구 옆에 조용히 내려놓고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한 시각보다 조금 늦었음에도 집주인은 아직 근처 밭에서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잠시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은영은 여느 때와 똑같이 묵묵히 기다리기로 했다.


쇼핑백 꾸러미와 백팩을 들어다 벤치 위에 가지런히 올려 두었다. 은영은 벤치 한구석에 앉아 작년과 달라진 곳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매년 혼자 행했던 틀린 그림 찾기가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비슷했다. 게임 속 작은 화면으로도 틀린 그림 찾기를 잘하지 못했던 은영에게는 여전히 이곳은 달라진 게 하나 없어 보였다. 


눈을 감고 벤치에 등을 기댔다. 나뭇잎과 풀들이 스치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단조로운 하모니를 이루었다. 새벽부터 바삐 움직였던 휴일이 이제야 진짜 휴일처럼 느껴졌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여기를 찾을 때마다 은영의 고민이 덧대어졌다. 도시를 좋아하던 은영마저 이제 은퇴하고 작은 텃밭이나 일구며 살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이곳에는 도처에 평안함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머리 한쪽 구석에서는 어제 진행하던 연구에 대한 다음 과정을 그리기 바빴다. 몸에 절반이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그득 찼다 해도 과언이 아닐 그였기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과제가 남아 있는 이상 은영은 연구실을 떠날 수 없었다. 남편이 종종 ‘호기심 꾸러기’라는 별명으로 부를 때마다 어쩜 저렇게 별명을 잘 지었을까 감탄하곤 했었다.


한참 과거에 기분 좋은 기억 어딘가에 흘러 다닐 즈음, 집주인이 흙먼지를 훌훌 털며 모습을 드러냈다. 은영은 반가운 마음을 담아 꾸벅 인사를 한 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유. 왔으면 말을 하지! 왜 매번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이.”

“똑같이 매번 말씀드리지만, 저 여기 오는 날은 바쁜 사람이 아니라 제일 한가한 사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우리야 여전하지 뭐. 은영 씨도 잘 지냈고?”

“네. 선생님 덕분에 잘 지낸 것 같아요.”


문화는 호탕하게 웃으며 남편은 아직 밭에 할 일이 남아 조금 이따가 올 거라며 말을 이었다. 매년 행해지는 연례행사처럼 은영이 바리바리 싸 온 선물에 옥신각신 말을 주고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뭘 이렇게 많이 싸 들고 왔냐 아우성치었고, 한쪽에서는 손이 부족해서 이것밖에 못 들고 왔다며 능청스럽게 굴었다. 


“기다릴 거면 먼저 가서 같이 보고 있지. 왜 벤치에 혼자 앉아있었어.”

“선생님네 꽃밭은 너무 예뻐서 허락받고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언제든지 보셔도 좋습니다. 은영 씨 고집도 한결같네.”

“황소고집이 어디 가나요.”

“해지면 얼마 보지도 못하니까 얼른 가서 같이 구경해요. 나는 다시 밭에 나가봐야 해서.”

“네. 올해도 감사해요.”

“아유. 안 그래도 된다니까 그러네. 그럼 같이 구경하고 있어요! 이따가 꼭 저녁 같이 먹고 가고!”

“네. 천천히 볼일 보시고 오세요!”


문화는 삐딱하게 서 있던 농기구 몇 개를 주워들었다. 곧이어 은영에게 얼른 가보라며 손짓을 하곤 오솔길 사이로 걸어갔다. 은영은 문화가 오솔길 사이로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봤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벤치로 다가가 백팩을 열어젖혔다. 은영은 열어젖힌 가방에서 태블릿PC 뒤로 손을 넣어 비슷한 크기의 액자를 꺼내 들었다. 혹시 먼지가 앉진 않았나 액자를 몇 번 손으로 쓸어주곤 같이 꽃밭으로 향했다. 


자원봉사 활동을 하다 만난 문화는 교사로 오래 근무하다 은퇴한 뒤, 전 직업을 살려 글을 읽으실 줄 모르는 어르신들에게 한글을 알려드리고 있었다. 그런 문화를 도와 은영이 문화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면서 친해진 인연이 어느새 5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자원봉사 중간 쉬는 시간에 문화가 자신이 키운 꽃밭 사진을 들고 자랑했었다. 큰 목소리로 자랑했던 꽃밭은 은영이 매년 전국을 들쑤시며 찾아다니던 여느 꽃밭보다 더 근사했다. 그 이후로 은영은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년 이맘쯤이면 문화네 방문하곤 했다. 은영이 예쁜 꽃밭을 찾아 전국을 쏘다니다 문화네 꽃밭에 정착한 지 올해로 꼭 3년째였다.


빨간 지붕 반대편 길로 넘어가자 눈이 시릴 정도로 예쁜 노란 꽃밭이 펼쳐졌다. 이맘때 문화네 꽃밭은 장관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멋진 풍경을 선사했다. 드넓게 드리운 노란 꽃 사이를 노닐면 꼭 꿈속을 걷는 것 같기도 했다. 은영은 저도 모르게 혼자만 노란 향연에 심취해있다가 부랴부랴 액자를 반듯이 들고 같이 풍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여보. 올해도 참 예쁘다. 그치?”


액자 속 은영의 남편은 아무 말 없이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은영은 남편이 올해는 더 활짝 웃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둘은 조용히 꽃밭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새가 우는 소리가 이따금 들릴 뿐, 둘은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채 다정한 대화를 이어갔다. 침묵의 대화를 계속 이어갈 즈음 은영이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매번 쉬는 날이 겹치면 같이 꽃 보러 놀러 가자는 말을 참 많이 했는데…. 둘 다 일이 뭐라고 같이 꽃 한 번 보러 가지 않았을까.”


 은영과 그의 남편은 삶에서 일이 제일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둘은 성격이나 성향이 잘 맞았지만, 같은 연구단지에서 근무하면서 일에 쫓겨 서로의 얼굴을 잘 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서로 아쉬워하지 않았다. 일이 꿈이었고 꿈이 일이었던 둘이었다. 밤샌 연구 끝에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으면 서로 자기 일인 것처럼 기뻐했던 나날이었다.


그러던 남편이 어느 날 아무런 인사 없이 하늘로 돌아갔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심근경색이었다. 청천벽력 같았던 그 날 이후로 서로 먼 미래를 상상하며 건넸던 말들이 모두 후회로 날아와 가슴에 박혔다. 같이 보내는 휴일의 꽃놀이가, 둘을 닮은 아이를 같이 기르는 모습이, 희게 바란 머리를 서로 곱게 넘겨주자던 그 약속이 모두 한 줌의 재로 돌아왔다. 그 한 줌의 재를 쥐고 갈 길을 잃었던 은영은 이제라도 남편을 데리고 서로가 했던 말들을 하나하나 지켜나가기 시작했다. 은영은 옅어진 추억과 남편의 사진을 꼭 부여잡고 힘겹게 한 번 더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이제 조금 덜 아픈 거 같아요. 그리고 계속 덜 아프도록 노력할 거예요. 당신도……. 거기선 아프지 않길 바라요.”


작고 노란 꽃잎들이 우수수 바람에 같은 춤을 추었다. 둘은 자박거리는 발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가만히 꽃들의 춤을 감상했다. 흩날리는 노란 꽃잎 사이에 두 가지 색의 슬픔이 조금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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