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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Jun 07. 2021

연어 맛 사료를 싫어하는 고양이

식성은 변하지 않더라고.

부리나케 뛰었다. 발을 재빠르게 놀리면서 해가 기운 방향을 확인했다. 늦겠는걸. 하필 저번에 놓쳤던 녀석이 눈앞에 나타날 게 뭐람. 그 녀석을 겨우 잡아채 목을 비틀어 놓느라 시간이 지체된 줄도 몰랐다. 잡아다 은신처에 가져다 놓은 것까진 뿌듯했는데, 시간이 늦으면 일찍 일어난 게 소용없어지잖아. 더 빨리 뛰어야 해. 여기인가. 아니. 저기 다섯 번째로 진한 회색 담벼락에서 좌회전!


 좌회전하려다 담벼락 맞은편 통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녀석의 목을 비틀다 입가에 거뭍하게 묻은 피들이 흰 털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아이참. 시간 없는데. 급하게 담벼락 위에 앉아 세수했다. 열심히 세수하다 유리를 흘끔 보고, 반대쪽 덜 펴진 부분을 열심히 매만지다 흘끔 보고. 짧은 시간 내에 뭉툭한 손으로 아무리 노력해 봤자 검붉은 색이 연한 핑크빛으로 바뀌는 정도일  테지만, 네가 놀라지 않도록 최소한의 노력은 보여야 했다.


 그사이 해가 조금 더 기울었다. 결국 입가를 딸기우유색으로 물들인 채 그리운 곳을 향해 냅다 뛰었다. 저번 다리보다 훨씬 빠르긴 한데 여전히 성에 차지 않았다. 암묵적인 약속 시각이 점점 다가왔다. 해가 거의 약속 시각에 도착했을 때 즈음, 다행히 나는 앞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언제 뛰었냐는 듯이 제일 볕이 노릇노릇한 곳에 풀더미에 털썩 앉았다. 이윽고 몸을 길게 늘여 뛰느라 조금 간지러웠던 등을 까끌까끌한 풀 사이로 문질렀다. 아. 등이 손에 닿는 건 참 좋은 행복이었구나. 뒷발로 탈탈 털어보았지만, 여전히 간지러운 등 어딘가에 닿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 거기다 뭐라도 얹어놔야겠는 걸. 다시 한번 풀 사이사이에 온 등을 비볐다. 누가 봐도 여기서 한 판 진하게 뒹굴었다는 듯이 엉망이 되었다. 음. 완벽해.


 약속 시각이 다 되자 문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래. 너는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다. 내가 종종 늦을 때가 있었을 뿐이지. 그래도 오늘은 저번에 놓쳤던 녀석도 잡았고 늦지도 않았다고. 인기척이 가까워질수록 괜스레 발톱을 세워 한쪽 땅구석을 벅벅 긁었다. 빨리 나와. 엄청 보고싶은데.


드르르륵. 통유리 베란다 문이 열리자 당연한 수순으로 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연한 분홍빛 치마를 입었네. 사줬을 때는 잠옷 같아서 싫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괜찮았나? 그때보다는 조금 더 얇은 눈동자로 치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는 조금 끝이 구겨진 원피스를 아무렇지 않게 다시 깔아 뭉개고 앉았다.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섭다.


"벌써 와 있었어? 오늘 내가 조금 늦었나? 언제부터 와 있었어?"

냐아옹

"등이 이게 뭐야. 오래 기다렸나 보네. 지겨웠구나?"

냐옹

"나 부르지 그랬어. 이리 와. 어떤 고양이 등이 이렇게 지저분해."


전할 수 있는 대답이 냐옹 밖에 없는지라 그나마 울음을 조금 길게 늘여보았는데. 역시나 못 알아듣는 듯했다. 하긴 나도 그랬었지. 일단 네가 오라고 했으니 나는 가야만 했다. 흙발을 살짝 털었다. 그리고는 못 이기는 척 네 주위를 맴돌다 네 무릎 위로 풀썩 뛰었다. 연한 분홍색 치마가 하얀 내 앞발과 자잘한 흙들로 덮였다.


"오늘은 어디 갔다 왔길래 발도 지저분해?"

냐아아아옹

"넌 꼭 잔소리하면 크게 울더라? 너도 잔소리는 싫니?"

냐옹

"보면 볼수록 진짜 많이 닮았다니까. 너도 연어 맛 사료 안 먹잖아."

냐옹

"그 사람도 그랬어. 너처럼 잔소리를 조금 싫어하고 연어를 못 먹었어."


흰색 앞발을 가지고 기다란 꼬리를 지녔으면 변할법도 한데. 다시 태어나도 식성은 변하지 않더라고. 마지막 말에는 찔리는 게 많아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너에게는 없는 내 화려한 꼬리를 바닥에 두어 번 내려쳤다. 너의 허벅지와 바닥 어딘가가 퉁퉁 울렸다. 너는 꼬리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등에 있는 풀들을 뽑아냈다. 이윽고 내가 간지러웠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었다. 그래 거기야 거기. 좀 더 긁어봐. 척추가 느슨하게 이완되는 느낌이었다. 이제 보니까 사람 손이라는 게 조물주의 꽤 좋은 작품 중 하나였다. 있을 때가 좋았지.


"오늘 그 사람 만나고 왔어."

거기 가지 말라니까 왜 또 갔어. 난 항상 네 옆에 있을 거라고 했잖아.

"잔소리 아니니까 들어봐. 거기로 가는 길가에 그 사람이 좋아했던 해당화가 너무 예쁘게 핀 거야. 그것도 제일 좋아했던 분홍빛 색깔로."

너는 싫다고 했잖아.

"연한 분홍색이면 더 좋겠지만, 그게 어디니. 그래서 해당화 사진 예쁘게 찍어서 그 사람한테도 보여줬지. 봐봐. 예쁘지? 향은 더 좋았는데."

잘 찍었네. 네 무릎이 더 좋은데. 아직도 그 로션 바르는구나.

"......예쁘다. 그치."

......냐아옹.


그는 그 이후로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손은 계속 내가 간지러웠던 등 어딘가를 쓰다듬었다. 나는 가끔 찾아오는 이 적막함을 너무 잘 알았다. 고양이는 듣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로 내 이름을 계속 부르는 시간이었다. 예전에 몇 번이나 이 고요함을 방해해봤지만, 이전 생의 나를 이기는 일은 없었다. 오늘은 그나마 좀 적게 내 이름을 부르길 바라며 고개를 네 무릎 사이에 기댔다. 우리가 여기로 이사 왔을 때 샀던 시계 초침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졌다. 아직도 시계 속 우리는 비슷한 모습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오늘도 평생 함께하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고양이는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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