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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Jun 11. 2021

검은색으로 물들면

살면서 삶이 우리 뜻대로 된 순간이 얼마나 있었던 거 같니.

"선배."

"응?"

"저 퇴사하려고요."

"축하해."

"진짜예요."

"나도. 진짜 축하해. 아까 자료 나한테 넘겨줬었나?"


아니요. 지금 그거 하다가 나왔어요. 선배의 마지막 말에 대한 대답은 차마 전하지 못했다. 자리에 돌아가 앉는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책상 위에는 여기저기 빨갛게 체크한 자료들이 너저분하게 놓여 있었고, 컴퓨터 화면은 아까부터 진전이 더뎠다. 웹툰 공모전에서 또 떨어진 지 3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이번이 몇 번째더라. 원숭이도 이만하면 더는 나무를 쳐다보기 싫어하지 않을까. 원숭이와 사람 그 어딘가를 헤매다 다시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놀렸다. 지금 당장은 사람으로 퇴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키보드 옆에 앙증맞게 포장된 마들렌 하나가 놓였다.


"조금만 더 힘내자. 오늘 끝내고 한잔할까?"

"네. 꼭이요."

"그래. 꼭 자료 넘겨주고 가라."


고이 쌓인 포장지에서 마들렌을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귀신같이 내가 좋아하는 얼그레이 마들렌이 입안에 녹아들었다. 말없이 사람을 참 잘 챙기는 사람이었다. 나는 나조차 챙기기도 힘든데.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 걸까? 곁눈질로 선배를 따라갔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풀썩 제자리에 앉았다. 천장 어딘가를 바라보며 흐리멍덩했던 초점이 책상 한구석을 향했다. 스르르 선배의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


아.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쳐다보지 말걸. 봐선 안 될 걸 본 느낌이었다. 부리나케 자료를 정리하는 척 머릿속을 비우려 노력했다. 내가 허둥대는 동안에도 아직 선배의 눈길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액자에 고여있을 터였다. 그 액자 속에는 5년째 병상에 누워 계시는 선배의 어머니가 있다는 걸, 우리 팀원 중에 모르는 이는 없었다. 사무실에는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와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선배도 나도 무언가를 견뎌내는 시간이었다.








"사장님! 여기 무뼈닭발 매운 거랑 소주 한 병이요!"

"밥도 하나 주세요!"

"역시. 나 챙기는 건 소영이 뿐이네."


매운 걸 좋아하면서도 탈이 잘 나는 선배는 꼭 매운 음식에 밥을 곁들여 먹었다. 저런다고 속이 좀 덜 아플까 싶긴 한데 또 잘 먹는 걸 보면 실제로든 플라시보든 효과는 있는 듯했다. 대체로 매운 음식을 잘 먹고 고기를 먹을 때에는 고기만 먹는 내 식성과 판이했다. 고기 들어갈 자리도 모자란 위장이거늘.


금요일 저녁인데도 술집은 한산했다. 덕분에 목이 터져라 크게 얘기할 필요가 없어서 좋긴 했지만, 안주가 나오는 동안에 파김치가 된 사람 두 단은 말없이 서비스 계란찜만 쑤셔댔다. 계란찜을 반쯤 비웠을 때 잘 익은 닭발과 밥 한 공기가 나왔다. 이윽고 잔에 술이 채워지는 맑고 청량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배와 나는 둘 다 잔을 부딪친 후 말없이 한 잔을 비워냈다.


"그래서. 어떻게 됐길래 또 죽상이야?"

"네?"

"너 뭐 한다며. 만화 그린다고 했나?"

"또 떨어졌죠. 뭐.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네가 죽상일 게 그거밖에 더 있냐."


언젠가 거하게 취한 날. 술집 화장실에서 선배를 붙잡고 울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날이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아 억울할 따름이었다. 선배의 말로는 속이 뒤집어지는 와중에도 꺽꺽 대면서 계속 울었단다. 그리고 두 마디를 반복했다고 한다. 선배 나 일하기 싫어요. 전 만화 그리면서 살고 싶어요.


추태를 부린 다음 날, 나는 기억에도 없는 내 꼬락서니 덕분에 선배에게 종일 빌어야 했다. 퇴근 시간이 다 될 때까지 내 사과를 받아주지 않던 선배는 퇴근 시간 30분 전에 나를 탕비실로 불렀다. 아. 죽지는 않겠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들어간 탕비실에는 선배가 홀로 커피머신 앞에 서 있었다.


본보기로 원두가 나 대신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더니 커피를 진하게 뽑아냈다. 선배는 본인의 커피 한 잔을 내린 후, 그 옆에 있던 잔을 나에게 내밀었다. 탕비실에 놓여있었지만 단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던 곡물가루모음을 따뜻한 물에 탄 음료였다. 아직도 그 이름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죽기 전에 먹기에는 달달하고 호사스러운 음료였다. 그리고 선배가 내던진 딱 한 마디에 나는 다시 무너졌다. 누가 만화 그린다고 뭐라고 했어도 그냥 해. 그런 거 듣지 마.


기억에는 없지만 술에 거하게 취했을 때처럼 꺼이꺼이 울 순 없기에 탕비실 구석에 쭈그려서 다시 울었었다. 누가 뭐라고 했는데 그렇게 서럽게 울어? 엄마가요. 부모님이 그런 철없는 소리는 60 넘어서 하래요. 빨리 정신 차리고 일이나 하래요. 음. 그건 서러울 만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그랬다는 소리는 뺄 걸 그랬다. 특히 선배에게는 더더욱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었다. 몇 개월 전의 나는 아직도 이렇게나 철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엄마의 송곳 같던 말이 맞는 순간이었다.


"고작 2년째인데 벌써 지친 거 같아요."

"야. 우리 아직 앞날이 창창하다. 잘 버텨. 버티는 게 이기는 거야."

"제가 그리고 싶은 만화가 아니라 요즘 트렌드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하나 싶기도 해요."

"언제는 돈 필요 없다며."

"그래도 입에 풀칠은 해야 하잖아요."


현실이 자꾸 눈 앞을 가렸다. 어느 때는 소리소문없이 목을 졸랐고, 어느 순간엔 폐부를 깊숙이 찌르기도 했다. 다들 이러면서 성장했겠거니 싶어도 내 일이 되니 견디기 힘들었다.


"저번에 그 사람이 자기 대신 그려달라고 할 때 그냥 그릴 걸 그랬어요."

"어허. 그게 왜 또 생각나 잊어버리라니까."

"그래도 돈은 벌잖아요. 그림도 그릴 수 있고."

"네 색깔에 검은색이 섞이면 잠깐 오묘하고 신비로워 보여서 좋을 수 있지. 그런데 검은색은 언젠가 모든 색을 잡아먹기 마련이야. 본연의 색을 잃어버리기엔 아깝잖니."


검은색. 하지만 지금 나는 그 검은색도 간절했다. 누군가 검은칠한 나라도 봐주길 원했다. 2년간의 이유 모를 실패는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는커녕 고름을 만들었다. 선배의 말처럼 검은색은 참 쉽게 다른 색을 물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 잡아먹고 나면 다른 색의 흔적은 멀끔히 사라지기 일쑤였다.


"네 안에 검정이 가득 차면 소리라도 질러. 그것마저 힘들면 아무 펜이나 쥐고 만화를 그리든지. 아니면 일기라도 써. 펜에 대중적인 색깔이 왜 검은색이겠니."

"제 원래 색깔이 검은색일 수도 있잖아요."

"그럼 스스로 물어봐. 검은색이 네게 스며들 때 넌 고향에 온 기분이 들었는지, 침식당하는 기분이었는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선배는 자연스럽게 다시 내 잔을 채웠다. 함축적인 의미를 담은 한잔이 식도에서 위장으로 짜르르하게 넘어갔다. 그 한잔이 유달리 썼다.


"그럼 제 색은 무슨 색인데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난 그림도 그릴 줄 모르고 색도 칠할 줄 몰라."

"말씀은 청산유수 신데요."

"그러니까 이번에 내가 승진했지."

"아."

"아. 좋아하네. 입 벌린 김에 안주나 넣어라."


싸구려 플라스틱 앞접시에 꼬들꼬들하게 말린 닭발이 하나 얹어졌다. 뼈가 없는데도 닭발의 모양을 유추할 수 있을 만큼 기가 막히게 뼈만 없는 닭발이었다. 뼈대 없이 부루퉁한 껍데기만 남은 모습이 꼭 나 같았다. 내 색은 이 닭발 같은 색이려나. 꼬들꼬들한 안주를 씹었다. 이거라도 씹으면 꼭 빨간색을 소화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면서 삶이 우리 뜻대로 된 순간이 얼마나 있었던 거 같니."

"글쎄요. 잘 기억 안 나요."

"나도 그래. 근데 또 더듬더듬 찾아가 보면 몇 개 있어."

"있을까요?"

"너 맨 처음에 들어왔을 때 얼마나 활기차고 밝은 표정이었는 줄 아니."


그땐 이렇게 야근을 많이 시킬 줄 몰랐죠. 선배도 그랬잖아요.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기에 또다시 술을 반 잔 넘겼다. 이번에는 술이 다시 채워지지 않았다. 선배는 술 한잔을 모두 털어버린 다음 닭발을 질겅질겅 씹었다. 선배의 잔에 술을 한가득 따라주었다. 그 사이 선배는 밥을 한 움큼 입에 넣었다. 옆 테이블이 시끌시끌하게 떠드는 소리가 꼭 우리들 마음속 같았다. 시끄러운데 정작 지나고 들어보면 별것도 아닌 이야기들. 지금 이 순간만은 별거였기에 우리는 다시 계란찜을 들쑤셨다.


"선배."

"응?"

"고마워요."

"나도 고마워."


각자의 아픔을 계란찜 속에 파묻은 채 우리는 다시 잔을 부딪쳤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은 연락이 우리에게 쏟아질 거라 믿으며 술을 들이켰다. 아까보다는 술이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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