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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Apr 11. 2021

목이 마른 사막에도 꽃은 핀다 (下)

나의 할 일. 내가 할 일.



지원이 다시 눈을 뜨니 우주복도 입지 않은 채 혼자 맨몸으로 우주를 떠돌고 있었다. 아 나도 드디어 죽은 건가. 지원은 절망감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제 어깨를 짓누르던 죄책감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광활한 우주를 멀리 둘러보았다. 아주 새파란 젊은 별부터 늙고 왜소한 흰 별, 늙지만 거대한 빨간 별까지. 별들이 제각각 나이대로 알맞은 색을 띠고 있었다. 그때 제일 새빨간 별이 지원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질량이 꽤 컸던 모양이지만, 너도 곧이구나. 지원은 늙은 별의 안녕을 빌었다. 안녕을 모두 빌 즈음 빨간 별이 지원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너는 왜 여기 있니.

“…. 나 말이야? 죽으면 별이랑 말을 할 수 있구나. 안녕. 어…. 나는 죽어서 여기 있을 거야.”

아니. 넌 아직 죽지 않았어. 나처럼.

“나 아직 안 죽었어? 그럼 난 왜 여기 왜 있는 거지?”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어.


온갖 수식과 숫자로 이루어진 뇌는 우선 이 상황이 이론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어, 이거 분명 논문감인데 이걸 어떻게 밝혀야 하지? 대화가 가능하니 생물학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나? 이 상황에서도 뇌는 착실히 돌아갔다.


“아무튼 나는 잘 모르겠지만 너는 곧 죽게 될 운명이구나. 너 엄청 빨개.”

응. 알아. 그래도 나는 나의 일을 하고 있어.

“너의 일? 너의 일이 뭔데?”

이 자리에서 계속 빛나는 일. 그게 나의 일이야.


별은 한자리에서 계속 빛나는 일을 한다. 곧 죽을 줄 알면서도 별은 제 할 일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묵묵히 빛나고 있는 빨간 별을 보며 지원은 다시 제가 마치지 못한 일이 생각났다.


“나는…. 내 할 일을 다 하지 못했어. 장비를 고치지 못해서 대원들을 살리지 못했어.”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아니야. 이건 나의 잘못이야. 내가, 내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빨리 통신장비를 고쳤다면 달라질 수 있었어.”

잘 생각해봐. 이 일이 벌어지게 된 이유는 엔진이 터졌기 때문이야.

“그건 그렇지.”

그래. 이 모든 일이 너의 잘못은 아니야.


지원은 목 끝까지 울음이 차올랐다. 노쇠한 별은 처음 보는 저를 온전히 위로해 주었다. 지원은 위로를 따라 온전히 울음을 내뱉었다. 눈에서는 서러움과 대원들에 대한 그리움이 흘러나왔다. 우주 공간 한 뼘 간격마다 눈물방울을 수놓았다.


너는 이제 어떻게 하고 싶니?

“정말 내가 아직 살아있어? 내가 살았다면…. 나는 더 내 일을 하고 싶어.”

그래. 그럼 이제 너의 일을 하면 돼.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서 모두 죽었을지도 몰라.”

반대로 모두 살아있을지도 몰라.

“정말 그럴까?”

모든 생명은 각자의 속도로 죽음을 향해 뛰어가고 있어. 너와 나 또한 그러하겠지. 그 사실을 모두 알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지. 그렇게 살아가는 와중에 물론 불행과 고통을 만나기도 할 거야. 반대로 희망도 만나고 행복도 만날 거야.

“지금 내 눈에는 불행과 고통밖에 보이질 않아.”

네 눈에 불행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행복이 되어보렴.

“내가? 그럴 수 있을까?”

그럼. 목이 마른 사막에도 꽃은 피는 법이란다. 너 자신이 행복이 되어 자신을 믿어주렴. 그렇게 행복이 자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을 나눠줄 수 있을 거야.

“내가 할 수 있을까?”

넌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항상 행복할 수는 없을지라도 행복이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행복은 너 자신일 테니까.

“……."

불행이 찾아와도 묵묵히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되, 언제나 너 자신을 믿어주렴. 그리고 넌 아직 무수히 많은 푸른 날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잊지 마. 만나서 반가웠어. 잘 가.


지원은 번쩍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는 통제실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 와중에도 생존본능이 작동했는지 한 손에는 조금 남은 생식바가 쥐어져 있었다. 눈물로 인해 시야 전체가 먹먹했다. 목 끝까지 차오른 대원들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러보고 싶었다. 먹먹함을 힘겹게 걷어내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지원의 어깨에 내내 박혀있던 죄책감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두 달 내내 지원을 괴롭혔던 어지럼증과 두통은 씻은 듯이 사라진 상태였다.


나의 할 일.

내가 할 일.

처음부터,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처음부터 천천히 짚어 가는 거야.


모니터에는 온갖 수식과 숫자가 떠돌았다. 모니터와 씨름한 지 열여덟 시간째. 꿈에서 깨어난 이후로 하루 가까이 수많은 에러 표시를 마주했었다. 지원이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 한 줄만 더 입력한 후 시스템을 가동하면, 이번에는 다른 결과를 마주할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이제 똑같은 빨간 에러 표시를 본대도 상관없었다. 지원은 제자리에서 끝까지 자기 일을 하리라 다짐했다. 잘못되었다면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보면 그만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믿어. 목이 마른 사막에도 꽃은 피는 법이니까. 

지원은 중얼거리며 마지막 수식을 입력했다. 파란색 바에 퍼센트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32%. 로딩되는 동안 지원은 숨을 죽이고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

.

45%.

.

.

78%

.

.

82%


항상 78%에서 에러 표시가 뜨던 전과는 다르게 모니터는 82%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제발 조금만 더. 지원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를 앙다물고 주먹을 꼭 쥔 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약 두 달 만에 처음 보는 초록색 글자가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100%

.

.

.

.

"여기는 ROOM-03. 여기는 ROOM-03. MS 황중현입니다. 중앙 통제실 들립니까?"


이제 모두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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