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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Apr 13. 2021

[생각 6] 청개구리 심보로 얻은 행운

꿈에도 몰랐던 행운이 '통'하고 떨어진다면?


그런 날이 있다. 평상시에 전혀 하지 않던 일을 하고 싶은 날. 평소에 좋아하지 않던 음식이 가끔 당기는 날. 가끔 나에게도청개구리 심보가 찾아왔었다. 오늘은 그 청개구리 중 한 마리를 꺼내 보려고 한다.



집순이인 나는 밖에 나가는 일 자체가 스케줄로 인식된다. 어? 라면이 없네. 설마 라면을 사러 나가야 하는 상황인 거야? 그럼 다른 음식을 먹자. 라는 의식의 흐름마저 매우 자연스러울 정도로 집 밖에 나가는 일 자체를 만들지 않는 편이다. 집 밖에 나간다면 기분 좋은 약속이나 자본주의의 굴레 딱 두 가지로 나누어질 정도.



그러니 집에 가는 속도와 방법 또한 중요하게 여긴다. 어떻게 하면 집에 빠르고 편하게 갈 수 있지? 어떤 날은 조금 늦어도 편하게 돌아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어떤 날은 몸이 조금 힘들어도 피니쉬라인에 빨리 도달할 수 있는 대중교통 환승을 이용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항상'이라는 게 존재했으니, 바로 '최소 도보 시간'이다.



키가 좀 크면 몰라. 발바닥부터 정수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키라면, 다리 길이 또한 그리 길지 않다는 걸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신이 내린 비율이 아닌 이상 고만고만한 다리를 지니고 다니는 수밖에 없다. 애석하게도 난 삼신할매의 원 픽이 아니었다. 근데 이렇게 걷기 싫은 거 보면 픽에서 좀 많이 떨어졌나 본데....



물리적인 환경과 외부적인 다른 환경도 모두 고려했을 때, 항상 도보 시간을 최소로 잡아 이동하느라 환승하는데 도가 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도앱도 잡아내지 못하는 환승 라인을 만드는 능력이 생겼달까. 특히 아는 길은 '여기에서 이렇게 가기보다 돌아서 다른 정류장을 이용하면 더 쉽게 갈 것 같은데?'라는 감도 온다. 그리고 그 감이 맞아떨어질 때마다 그렇게 기분이 좋다.



하지만 여기서 청개구리 심보가 발생할 줄이야. 그날따라 적어도 도보 15분 + 버스 6 정거장 (환승 1번 포함)인 거리를 걸어서! 집에 가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 나 맞아? 갑자기 왜 그래?' 라고 묻고 싶을 정도로 나답지 않은 발상이었다. 나에게 긴 도보란 지인들과 재미있게 얘기하며 아이쇼핑을 하거나 가벼운 산책이 전부였다.



도보 15분 + 버스 6 정류장 (환승 1번)을 도보로 걸으면 대략 1시간 남짓 되는 거리였다. 그날은 햇볕이 조금 내리쬐는 4월이었다. 평상시와 다르게 미세먼지가 없고, 하늘이 맑아서 홀렸던 탓일까. 제대로 된 하늘색과 몽글몽글한 구름이 나그네의 옷을 벗게 만들었다. 점퍼를 가방에 넣고 집에 걸어가는 나그네가 되어 천천히 길을 걸었다.



처음 걸어서 가는 길이라 버스 노선과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야 했다. 지도 길 찾기 방식을 도보로(!) 바꾸어서 중간중간 예상 경로를 보며 걷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게 보였다. 항상 정해진 루트로만 보여주었던 버스 창밖 풍경이 4D로 와닿았다. 그것도 평소보다 0.5배 이상 느린 슬로우 화면으로 지나가면서 구경하니 더 달라 보였다.



여기 이런 디저트를 파는 곳이 있었구나. 조금 외진 곳에 있어서 몰랐네.

이 나무는 뭔데 꽃을 이렇게 화려하게 피웠지? 여기 원래 이런 나무가 있었나? 향도 너무 좋다.

바람 부니까 흙냄새도 조금 난다.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웬만한 자장가보다 낫네.



심지어 10년 넘게 살던 생활권 근처인지라 더 신기했다. 나름 이곳 지리를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가게가 있고 도로마다 자리 잡은 나무 종류마저 달랐다. 심지어 상가 골목을 지나갈 때면 가게마다 스치는 바람 냄새마저도 판이했다. 사실 그때부터 기분이 좀 좋았다. 생각보다 집에 걸어가는 게 괜찮은데?



이때는 나도 모르게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 기분 좋음이 서서히 정점에 다다르고 있을 즈음. 눈앞에 다리가 나타났다. 버스를 타고 갈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갔던 다리인데, 생각해보니 나는 집에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했다. 솔직히 좀 당황했었다.



차도 옆에 넓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었고 그 사이에 가이드라인(?)까지 있는 다리였지만, 옆에 차가 쌩쌩 달리고 심지어 버스도 큰소리를 내며 지나가니 좀 무서웠다. 실제로 다리를 건너갈 때 버스나 큰 화물차가 지나가면 다리의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잘 걷길래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다리를 지나갔다.



쫄보가 그렇게 다리 중간 즈음 왔을 때, 버스를 타고 가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우연한 행운을 맛봤다. 나는 소리도 물 내음도 없이 조용한 내천 위쪽 다리에 서 있었고, 천은 조용히 거울이 되어 하늘을 비췄다. 조용한 천 안에는 내 팔뚝보다 더 큰 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쳤고, 작은 새끼잉어마저 보일 정도로 물이 맑았다. 물론 지나다니는 차들의 매연 냄새가 살짝 나긴 했지만, 내가 그때 보았던 풍경은 그 냄새를 모두 정화할 만큼 예뻤다.



그 풍경들을 놓칠 수 없었다. 이왕 청개구리가 된 거 청개구리 심보를 하나 더 꺼내 들었다. 카메라를 들어 풍경을 찍기 시작했다. 내가 찍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예쁜 풍경이 카메라와 눈동자에 담겼다. 같이 사진 감상해보시죠.


2019년 내가 찍은 우연한 행운. 아파트 분양 광고 아닙니다. 일반폰카입니다.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평상시 사진을 찍지 않은 게 여실히 드러날 정도로 초점 나간 사진이 많았다. 게 중에서 제일 잘 나온 게 이 사진인데 아파트 분양 광고 CG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풍경이 너무 좋았다. 사진을 가족 단톡방에 전송하고 마저 다리 위를 걸어 내려오며 생각했다. 다음에 또 걸어와야지. 저 정도 풍경을 선물 받을 수 있으면 집에 걸어올 만한 것 같다.



물론 다리를 내려와 벚꽃길에서 사진을 몇 장 더 찍기도 했다. 여기서부터는 초점이 많이 안 맞더라. 어휴. 참고로 일 작가는 체력이 방전되었으면 방전되었지 수전증은 없다.



초점은 온데간데없지만, 그래도 벚꽃은 아름다웠다.


살짝 필터를 걸어주면 흰색 벚꽃도 분홍색 벚꽃이 된다. 현대기술 만만세.



버스를 포기하고 우연히 도보를 선택했던 나 자신에게 칭찬을 퍼부었다. 이야. 너 간만에 좋은 선택 했다. 왜 진작에 이 생각을 못 했지? 잘해쓰. 아직도 햇살이 좋고 맑은하늘에 구름이 떠 있는 날이면 종종 집에 걸어가는 일이 늘었다.



이 이후에도 똑같은 자리를 지나갈 때마다 사진을 찍어봤지만, 저 날 찍었던 사진만큼 잘 나오지 않았었다. 우연한 기회에 마주친 풍경이라 그랬을까. 우연한 행운은 자주 찾아오지 않았다. 이후에는 조금 시시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걸어갈 수 있으면 자주 걸어 다니는 길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가끔 나타나는 청개구리 심보가 늘었다. 그리고 기분 좋은 일들을 하나둘 더 발견했다.



나는 생각보다 공원에서 자전거 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왕복 3시간을 타도 재미있더라.

좋아하는 사람들과 공원을 같이 걷는 것보다 혼자 느긋하게 걸으며 음악 듣는 걸 선호한다.

낮에 햇볕이 뜨겁더라도 낮에 산책하는 걸 즐기지, 밤에 산책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벤치에 앉아서 광합성(!) 하는 걸 좋아한다. 피부가 노화가 되든 말든 그건 나중 문제다.



(실제로 대부분의 고양이는 그러지 않지만) 꼭 산책 맛 들인 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은 하지 못하지만, 코로나가 걷히고 나면 사람이 많은 공원도 걸어보고 싶다. 아직은 한적한 공원을 주로 다녀서 내가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할지 싫어할지 가늠을 못 하겠다.



가끔 청개구리 심보가 나타나면 애써 무시하지 말고 할 수 있으면 도전해보라 권하고 싶다. 어쩌면 일 작가처럼 우연한 행운을 맞닥뜨릴지도 모르고, 심지어 새로운 좋은 습관과 행동을 찾을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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