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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Apr 17. 2021

[생각 10]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평소엔 굴러다니더니 왜 찾으면 없어.

각자 일을 하는 스타일이나 직종에 따라 친한 도구들이 있다. 나에게 그 도구는 마우스와 키보드였다. 원래는 두 개 모두 블루투스 형식이었는데, 작년에 마우스가 먼저 사망해 버렸다. 그래서 요즘엔 데스크톱을 사면서 사은품으로 딸려온 유선 마우스를 사용하고 있다. 유선이 조금 불편하지만, 아직은 오색찬란하게 빛을 내고 그립감이 부드러운 게 음. 쓸만하다. 



아무튼 그중 조금 더 친숙한 도구를 고르자면, 나는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놀리는 시간이 더 많으니 키보드가 더 친숙하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자주 사용하는 도구가 키보드인 사람들은 한 번쯤 공감할 주제. '키보드 치는데 손톱이 굉장히 거슬린다.' 자칫하면 손톱 덕분에 손가락이 키보드 자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더블악셀을 뛸 수도 있다. 손톱이 길면 길수록 오타율도 조금씩 늘어가는 건 내 기분 탓일까.



물론 키보드를 자주 이용해도 손톱을 충분히 기를 수 있고, 예쁘게 꾸미며 개성을 뽐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손톱은 아세톤 솜질 한방에 사포가 지나간 것처럼 흠집이 남는 손톱인지라,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를 칠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네일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런 내 손톱인데 이상하게 자라기는 무척 빨리 자란다. 키로 가지 못한 영양분이 뒤늦게 손톱으로 모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말 손톱이 빨리 자란다.



성격상 일에 걸리적거리는 건 냉큼 치워버리는 스타일이라, 키보드를 칠 때 조금씩 손톱이 걸리적거린다 싶을 때 그날 바로 손톱을 깎는 편이다. 손톱을 깎을 즈음엔 손톱이 간신히 2mm 정도 자라있다. 그냥 손톱과 손가락 사이에 손톱깎이가 들어갈 틈이 있으면 손톱을 깎은 셈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에서 손톱깎이를 제일 애용하는 사람이 나였고, 그 위치는 가족 비상약 서랍 제일 바깥쪽으로 정해져 있었다. 



오늘은 따사로운 주말이자 토요일이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느지막이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타자를 몇 번 치지도 않은 상황에서 키보드에 손톱이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또 손톱 자를 때가 되었나 보네. 아휴 지겨워. 하던 일을 멈춘 채 자연스럽게 티비 장식장에 다가갔다. 맨 끝 가족 비상약 서랍을 열고 약들 사이를 헤치며 손톱깎이를 찾았다. 개똥이 그 자리에 없었다.



물건들이 사라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얘들은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사라지는가. 조그마한 머리끈, 손톱깎이, 옷핀, 포스트잇 플래그, 펜, 클립 등 제 발 달려 도망가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다. 나중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오면 정말 발이 달렸나 한 번 살펴보기도 잊지 않는다. 



본론으로 돌아와 나는 이번 개똥인 손톱깎이를 찾기 위해 한숨을 내쉬며 집 안 전체를 휘이 둘러보았다. 비상약 서랍 옆 칸부터 시작해서 집안 모든 서랍까지 아무리 뒤져도 그 작은 손톱깎이 하나가 안 나왔다. 우스개 삼아 냉장고를 뒤져봤지만, 역시나 냉장고에도 없었다. (TMI : 과거 우리 집에선 티비 리모컨이 냉장고에서 나온 적이 있었다.) 



당장 손톱깎이를 사러 나가자니 귀찮음이 발목을 붙잡았다. 온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손톱깎이 쓴 다음에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나냐고 물어봐도 기억날 리가 만무했다. 발 달린 개똥, 아니 손톱깎이가 이번엔 정말 집을 뛰쳐나간 것일까. 손톱깎이에게 잘못한 일은 없는 거 같은데.



30분 정도 온 집안을 뒤지다가 결국 구석구석 쌓인 먼지만 쓸었다. 본의 아니게 청소를 마치고 의자에 앉은 나는 3가지 보기를 생성했다.



1. 가족이 쓰고 다른 곳에 둔 뒤 기억이 나지 않는 상황

2. 내가 쓰고 다른 곳에 둔 뒤 기억이 나지 않는 상황

3. 드디어 손톱깎이가 발이 달려 도망갔다.



3번은 당장 논문감이었고 논문 쓰기는 굉장히 고단한 과정이기에 패스했고, 가능성 낮은 2번을 거쳐 1번이 제일 유력한 상황으로 뽑혔다. 어쩔 수 없이 가족이 모두 돌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키보드를 칠 때마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손톱이 닿지 않게 키보드를 쳐보아도 손가락은 곧잘 미끄러졌다. 특히 새끼손가락은 힘없이 손톱으로 자판을 누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오늘따라 새끼손가락으로 눌러야 하는 shift 키를 자른 자리에 뽑아다 옮기고 싶었다. 그리고 이게 오늘 브런치 글이 늦은 이유이다.



가족 구성원이 집에 들어올 때마다 손톱깎이 쓰고 어디에다 뒀냐고 물어봐도 대답은 아까와 동일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단 가족 모두 저녁을 맛있게 먹은 뒤, 전 인력이 손톱깎이 찾을 일에 투입되었다. 엄마는 드라마 봐야 한다며 8시 이전에 꼭 찾아야 한다고 마감 시간까지 정해 두셨다. 30분 안에요? 좀 촉박할 것 같은데.



더 많은 손이 달라붙어 손톱깎이를 찾은 결과. 허무하게도 비상약 서랍 안 파스 봉투 안에서 손톱깎이를 찾았다. 누군가 파스를 쓰고 난 뒤 손톱깎이도 같이 쓰고 파스 봉투 지퍼를 닫았나 보다. 손톱깎이가 숨도 못 쉰 채 파스에 절여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범인은 못 잡았지만 개똥은 잘 찾았고, 나는 파스 냄새 풀풀 풍기는 손톱깎이로 무사히 손톱을 깎았다. 어째 집이 매일 시트콤화 되어가는 것 같아 아찔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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