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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고양이 Aug 09. 2024

ENTP 남편과 INFP 아내가
여행을 마무리하는 과정

암에 걸린 남편과, 그의 아내의 여행

저는 암환자입니다.


암은 작년에 걸렸어요. 이 이야기는 따로 쓰고 싶으니까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작년 초에 받았던 갑상선 초음파에 이상소견이 있었고, 추적관찰 후에 검사해 보니 자그마한 암덩어리가 기도에 붙어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연말에 입원하여 갑상선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고, 받는 동안 전이가 관찰되어 추가 시술을 진행했어요.


이 여행은 그런 우리 부부의 고생과, 고생 끝에 다가오는 결혼기념일에 무엇을 할까 하다가 조금은 즉흥적으로, 뭔가 기념이 오래될만한 여행을, 비행기를 타고 다녀오는 긴 여행을 다녀오자며 생각해 낸 것이었습니다. 아 처음에 쓸까 했는데 뭔가 아련할 것 같아서 빼버렸어요. 뭐랄까, 아픈 와중에 떠난 여행이라기 보다는 좋은 일을 기념하기 위해 떠나는 건데, 괜히 동정을 사진 않을까 하는 기우가 좀 있었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여행의 이유였지만, 마지막에 남겨봅니다.


반지가 없어도 반지를 낀 것처럼 되었어요


여러분은 어떤 여행을 좋아하시나요. 어떤 풍경과 추억이 마음속에 깊이 남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나요. 저는 사실 여행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냥 방에서 쾌적하게 있으면서 뭔가 보고 싶으면 그거 구글 이미지 검색으로 찾으면 되는 거 아니냐- 파예요. 그런 저를 끌고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건 아내였습니다. 아내는 여기저기 잘도 돌아다니며 저에게 여행이란 이런 거라는 걸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그렇게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눈이 트이고 마음에 빛나는 문장들이 하나 둘 남더라고요. 가령,


바다 위에 옛날 푸꾸옥 주민들이 생활하기 위해 설치한 낡은 나무다리 위에서, 혹시 위험할까 봐 고개를 숙이고 내딛을 자리를 보다가 눈에 비친, 삭은 나무판자 사이사이 파도의 물결과 윤슬, 그 위를 삐걱거리며 조심스레 걷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과 바다, 그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동부의 바다, 라든가.


혹은, 쇼가 끝나고 하늘 위를 수놓는 시끄러운 불꽃놀이의 폭죽 아래, 모두가 굳어 넋 놓고 하늘을 바라볼 때, 우리만은 서로를 보며 사람 없을 때 빨리 도망치자고 잡은 손을 끌고 놀이공원 입구로 빠른 걸음으로 가다 돌아보니 불꽃이 만든 그림자와 뭐가 재밌는지 환하게 웃는 아내의 미소가 예뻐 아예 뒷걸음질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우리만 움직이고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그 순간이라든가.


혹은, 둘이서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보며 바다를 찾아가려는데 아무리 봐도 길이 아닌 것 같은 이상한 골목, 건물 뒤, 공사 중인 구역을 지나 흙먼지 가득한 이상해보이는 골목 입구에 서서 둘 다 갸웃거리다가 용기 있게 발걸음을 내디뎌 들어가 귀퉁이를 꺾자마자 만난 골목 끝 뻥 뚫린 담벼락 사이 보이던 바다와 하늘 한 조각이라든가.


하는 그런 문장들, 이런 것들이 여행을 추억하고 그 힘으로 오래 기억하게 해주는 것들인 것 같아요.


이런 웃긴 간판도 만날 수 있어요


꽤 긴 여행이었어요.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옷을 전부 빨고, 밀린 청소를 하고, 고양이를 달래고,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와 일상에서 여행하는 중입니다. 예전에 박웅현 씨가 저에게 그랬어요. 제가 책을 너무 읽기가 어려운데 어떡하면 좋냐고 했더니 책은 글자로 여행을 하는 것이니 여행하는 방법을 안다면 책은 안 읽어도 괜찮은 것이 아니냐 하고요.


책 읽는 것 보다야 그게 나으니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아직도 여행 중이에요. 기억과 추억에 잠겨 지금의 느낌과 감정으로 정리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여행이겠지요. 그게 뭐 별거겠어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과 머리와 브런치나 어딘가에 어떤 형태로든 남기고 또 아무 때나 떠날 수 있는 게 여행이겠지요. 내 삶에 문장이 남는다면 충분합니다.


여행이 남긴 빨래들


다음엔 또 어디로 갈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건강히, 다음 여행도 건강한 몸으로 다녀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이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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