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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Dec 04. 2024

잠시 새가 되어본 생각

아저씨 차 뒤에서 너는 왼쪽 나는 오른쪽에 앉았다. 한 시간여를 달리는 차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는 진작 동이 나버렸다.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기에 그럴 수도 있고, 너라는 아이 자체가 본디 그리 수다스럽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나는 그런 너랑 너희 집 차를 타고 대전 엑스포에 가지만, 왜 네가 나랑 가고 싶다고 한 건지는 잘 알지 못한다. 아줌마(친구 엄마)가 울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대전에 나를 데려가도 되겠냐는 허락 비슷한 통보를 듣고 갈까 말까 할 새도 없이 너희 차가 나를 데리러 왔다. 티브이에서 워낙 떠들어대는터라 시골에 살던 나에게 꿈돌이와 한빛타워는 마치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번쩍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친구는 무척이나 조용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보이는 각자의 풍경에 심취한 척을 못내 하고 있었다. 가로수의 빈 둥지를 발견하고 그제야 할 말이 생긴 듯  "저거 봐라!" 했을 때, "어느 쪽이 더 많이 찾는지 시합할까?" 하는 네가 막 개발한 게임이 참 재밌을 것 같았다.


 

나무 위의 가지들을 시선으로 샅샅이 훑으며 차의 속도만큼 고개도 눈알도 덩달아 빠르게 움직였다. 잔가지를 빽빽하고 촘촘하게 모집어놓은 둥지의 모습은 나무에서 뻗어 나온 성근 가지 위에서 아슬하면서도 용케 떨어지지 않았다. 

가지를 물어다 나르고, 틈마다 끼우고 맞췄을 새의 건축학개론을 들어보고 싶다. 생전 그날만큼 둥지를 찾고 세어본 적이 또 있을까. 그 안에 놓여있을 파랗고 하얀 알에 대해 궁금해본 적 없지만, 내 낮은 시선으로부터 보이는 하늘 위의 작은 뭉치는 나무 본래의 형태인 것처럼 높아서 어지러웠다. 둥지 위로부터 바라보는 땅 위의 인간들이 일궈놓은 풍경이 그들에게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이제 와서 새삼 궁금하다. 

 

세대를 거치며 가르치고 배우고 전수해 온 인간의 문명과 과학기술로 인해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는 오만을 당연한 태도로 여기며 인간들이 여전히 주인인양 살고 있다. 구조와 형태를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타고난 건축가 앞에서 부실공사로 쓰러지는 최고급 아파트의 뼈대 휘는 소리가 날카롭다. 중력을 거스르는 그들의 고층 아파트 틈사이로 모진 바람이 비집지만, 비록 흔들릴지라도 떨어지지는 않는다. 나무를 선택하고 잔가지를 선별해 물어다 나르고 쌓았을 정성이 인간의 그것을 토대와 기초로 돌아가라고 조언한다. 크기와 두께와 안정성을 계산했을 작은 머리 새들의 건축물들이 대전으로 가는 내내 즐빗이 길가에 이웃하고 있었다. 



인간의 주거지 곳곳에 공원이라는 이름의 인공 숲이 도시설계도 그대로 오차 없이 들어서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소집한 중간 키의 이산가족 나무들이 성글게 모여든 곳에 반갑게 새들도 날아와 화룡점정이 된다. 도시 냄새, 매연 냄새 속에 억지로 들어앉힌 숲에 새들이, 곤충이, 못의 물방개가 자신들의 살 곳이라 인지하기에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 급한 마음은 나무에 인공 둥지를 달아 주고 어서 오라 불러보지만 대부분이 미분양으로 남아있다. 사람이 나무 위에 마련해 놓은 새집에 새가 살고 있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새들에게 집이란 자고로 작은 가지를 씨실 날실 삼아 엮어야 하는 것인데, 투박한 나무 조각 본드로 붙여놓은 집이 새의 입장에서 여간 옹색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뻐꾸기시계의 환상을 오래 품고 있다. 개집의 미니어처 같은 새집 속에서 시간마다 동근 구멍에 고개 내밀어 지저귀는 새를 언감생심 기대한다. 빈 둥지는 쓸쓸하지만 알을 품던 온기와 다녀간 숨결이 남아있다. 한 번도 주인을 두어본 적 없는 미니어처 개집에는 속없는 청설모만 들락거리고 있다. 


남방 대도시의 가로수는 몸통의 두께가 한아름을 넘고, 잎은 성인 손바닥 크기를 훌쩍 웃돈다. 한여름의 무성한 초록은 인도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의 낙엽은 그 큰 면적만큼 큰 공기의 저항으로 떠받히듯 우아하게 땅에 착지한다. 새들은 도로변의 가로수에 앉아 가끔 노곤한 날개를 쉬지만 아무래도 살 생각은 없어 보인다. 어디에서 날아와서 어디에 둥지를 틀고 사는지 알고 싶어도 따라가 볼 날개가 없으니 짐작할 수 없는 것을 나는 짐작하기를 그쳤다.



상하이 새들 다 여기서 사는구나!

한 나무에 두 개씩, 한 나무도 빠짐없이, 새 둥지를 품고 있는 가로수길이 이어진다. 한 마리의 새도 없는 창공에 덩그러니 올려진 플라스틱 새둥지가 보기에 민망하다. 자연을 표방하려는 누군가의 아이디어가 개밥그릇처럼 나무에 두 개씩 올라갔다. 새가 들어있을 리 만무한 둥지 안에는 LED알전구가 새알처럼 들어있다. 가로수에 가로등의 기능을 합친다는 신박한 아이디어에 그들은 유레카를 외쳤을까. 애초부터 새를 염두에 두지 않은 둥지에 무심코 지나가던 비둘기가 잠시 오해했다.  


진짜를 가짜 속에 만들고, 가짜를 진짜처럼 놓아둔 세상에 참은 과연 남아 있을까. 참을 찾는 것이 여전히 유용한가. 참은 그대로 참일 수는 없는가. 

수선스러운 생각들이 이파리 수런거리는 소리와 함께 몰려왔다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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