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눈소식을 카카오톡으로 전달된 몇 장의 사진으로 들었다. 사진에는 작년에 우리 식구가 된 발바리 사랑이를 안은 엄마가 흰 눈 배경 속에서 빛났다. 사진 속 반가운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흰 배경 너머의 감나무 가지 끝이 보였다. 고향집에는 네 그루의 감나무가 있는데 두 그루는 단감나무, 두 그루는 대봉시 나무다. 대봉시가 주황색으로 익기 시작하면 지금껏 무게를 잘 감당해 오던 가지 끝이 한계를 실감한다. 점점 묵직해지는 과실을 안타깝게 떨구고 마는 가지 끝에 감꼭지만 아쉽게 달리고 말았다.
떨어진 감은 지면과 만나 묵사발이 되지만 운 좋게 다른 가지에 걸려 가속도를 늦추면 대개 형태는 유지한 채 작은 찰과상만을 입고 떨어지기도 한다. 마당 한 구석에는 충분히 붉어지지 못한 채 떨어진 대봉시가 줄 맞춰 나름의 연붉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감은 홍시로 먹는 것이 제일이지만, 후숙한 후 먹어도 맛은 어딜가지 않는다. 나무에서 이탈한 과실은 시간이 지나며 과육이 물컹해지고 당도가 올라간다. 가운데 심지를 걷어내고 입속으로 직행한 감이 씨가 여물지 않아 먹기가 수월하다. 그 잼보다도 진하고 꿀보다도 단 맛을 모르는 이가 있다면 서운하다. 미리 맛본 올해의 감맛이 갈증을 키운다. 붉어질 대로 붉어진 감을 감망이 달린 긴 대나무 막대로 툭툭 건드려 따도 되겠건만 엄마는 극구 말린다.
"서리 맞아야 돼. 더 기다려."
식자재 배달을 시키러 장 보는 app을 켰다. 초겨울 날씨의 상하이는 잎채소가 겨울철답게 소담하다. 알배기 배추는 파란 겉잎을 벗은 채 뽀얀 얼굴로 소비자를 유혹했고, 작고 잔잔한 크기의 겨울 시금치가 흙밭의 온기를 안고 시장에 나와있다. 채소 이름 앞에 공통적으로 붙어있는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요 며칠 눈에 띄어 궁금하던 찰나였다.
대봉시나 채소도 서리를 맞은 후 맛도 올라가고 인기도 올라간다. 서리 상霜을 앞세운 마케팅이 채소의 신선함과 생명력을 브랜드처럼 달고 있다. 추운 시절을 겪은 채소가 일반 채소와 격을 달리 하는 것은 인간이나 자연이나 다를 바 없다.
한국에서는 겨울철 봄동과 냉이, 그리고 해풍을 맞고 자란 섬초가 대표적이다. 김장김치가 물릴 쯤이면 오후의 얼음밭에서 녹은 봄동을 뜯어서 만든 겉절이는 겨울철 입맛을 돋우는 역할을 톡톡이 한다. 된장에 무치거나 살짝 소금만 넣어 무친 냉이와 시금치도 자체의 단맛이 조미료가 되어 최고의 밥반찬이 된다.
서리를 맞아본 인생을 이전과 같은 삶이라 말할 수 있을까. 서리뿐 아니라 폭풍우를 거쳐온 일생은 어떠한가. 지식은 없어도 지혜는 내가 많다는 그들의 주름진 얼굴이 말을 대신한다.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는 이른바 인내야말로 사람의 그릇(크기)과 생각을 더욱 크게 키운다. 인생의 감칠맛은 거기에 숨어있지 않을까.
산책 길에 마주친 쑥, 미나리, 로즈메리를 쓰다듬었다. 추운 겨울에 서리를 맞고 견디는 이들의 생명이 참으로 귀하다. 똑 끊어서 코로 가져가고 싶은 손을 잠시 멈칫했다. 꺾는 대신 잎의 앞뒤를 문질러 손끝에 묻어 나온 향을 맡아본다. 몇 배로 농축된 향이다. 그 순간, 옆에 선 동백이 유난히 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몇 배로 고단한 삶에서 몇 배의 향과 색이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