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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Sep 27. 2024

복합기의 복합적인 문제

알 수 없는 네 마음

이유식을 시작한 아기는 그 생소한 식감과 맛에 얼굴을 찌푸리며 연신 혀로 밀어낸다. 최근 몇 차례 멋모르고 먹었다지만, 며칠새 까질대로 까진 입맛이 달착지근하고 간간한 것만 찾는다. 

정신이 혼곤하다.

우리 집 프린터 이야기다. 

A4용지 포장을 쫘악! 찢어내고 급지 칸에 쏟아 넣으면 몇 장씩 뭉텅이로 집어먹고 뭉텅뭉텅 뱉어낸다. 궁여지책으로 한 장씩 한 장씩 달래듯이 급지 해보지만 속도와 박자를 따라가기도 쉽지만은 않다. 

구김살 없이 반듯한 백지를 두 손으로 한 장씩. 지폐 앞뒤를 곧게 펴서 커피 자판기 입에 조심스레 꽂아주던 목마르고 공손한 손이 된다. 두 손으로 드리고, 두 손으로 받는다. 


엉덩이를 토닥이며 비위를 맞춰주면 곧잘 해내던 일들이었다. 심사가 왜 뒤틀린 건지 모를 일이다. 돌연 돌멩이처럼 굳어서 노란불만 깜빡거리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돌발상황에 머릿속 회로는 정지해 버린다. 뭐지?! 차가운 등을 들이대며 노랗게 쏘아보는 너의 눈이 낯설다. 나한테 왜 그래. 미칠 듯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물론 처음은 아니다. 그래서 달래는 법도 터득한 것이고, 이게 한동안 문제없이 잘 작용했기에 괜찮은 줄 알았다. 꾹꾹 눌러 참아오던 성질이 불쑥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질세라 더 우직하게 버티며 내 오금을 발로 찼다. 힘없이 무릎을 꿇고 뭐가 문제인지 묻고 또 물으며 너의 내장 곳곳을 헤집었다. 가만가만 만지며 가만가만 들여다보았다. 

아예 정신이 나가버리면 포기도 쉽겠지만 가끔 또 돌아오니까 그게 미련이 남아서 내가 이런다.


"여보, 이것 좀 봐봐. 여기 불빛이 계속 깜빡거리는데 뭐가 문제인 거야?"

"싸다고 사지 말고 제대로 된 걸 사아아. 새로 사아아아....."

눈길 한번 없이 말만 쏟아내는 남편의 입이 야속하다. 무안한 손가락은 애먼 스탑버튼만 기계적으로 누르고 있었다.


용지가 걸리고, 뒤에서 뽑아내고, 잉크통을 들었다 놨다, 스탑버튼과 전원버튼의 무한 반복이다.


리부팅하는데 갑자기 오장육부를 정렬하는 건강하고 씩씩한 소리가 났다. 다시 기대를 갖고 숨죽여보지만 이내 용지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나온다. 내 얼굴과 닮았다.

으아아아아악!

뚜껑이 열려 모공이 열린다. 두피에서 흐른 땀이 이마를 거쳐 눈으로 떨어진다. 시큰하다. 

잠시 허리를 펴 시선을 멀리 두고 제자리 한 바퀴를 돈다. 이걸 죽여 말어. 

이판사판, 무아지경이다.


"엄마, 제가 한번 해볼게요."


전원을 다시 뽑아 연결하는 부드럽고 고운 아이의 손길을 녀석이 응큼하게 느끼고 있다. 토너를 확인하고, 걸린 용지가 없는지 체크하는 배려의 눈빛 또한 의뭉스럽게 즐기고 있다.  한 장을 급지하고 시작버튼.

아무 일 없던 듯, 굼뜬 동작도 없이 녀석은 예쁜 컬러를 선명하게 뽑아낸다. 나는 넋이 반쯤 나간채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정지했다. 무념무상이다.


엊그제 프린트 성공의 경험이 자신감의 바탕이 되었다. 아이는 호기롭게 독서 활동지를 인쇄한다. 

자, 급지하고 시작 버튼!



돌멩이다. 다시, 돌멩이다. 

반복이다. 다시, 무한 반복. 

다시, 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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