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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Oct 07. 2024

개미는 거미가 부럽다.

BLACKPINK IN YOUR AREA

비가 철철 내리는 아침이다. 침대에 느직하게 오래 너부러지기 좋은 그런 아침이다.

온라인에서 주문한 와인색 장화 한 켤레가 사진 상으로 투박하지 않아 맘에 든다. 마침 내리는 비에 산뜻하게 신고 나갈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배송은 아직 저 멀리. 오늘은 나가지 말자고 누가 새끼손가락이라도 내민 듯 약속을 굳게 했다.


요즘 어린 친구들은 연예인 포토카드를 사고, 모으고, 나누고, 바꾸며 논다. 단순한 카드가 무슨 재미일까 싶다가도 나 어릴 때 종이 인형 어깨가 낡아 떨어질 때까지 만지고 놀았으니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즐거움에 끝이 없는가 보다. 라뗀 HOT가 제일 핫했는데 친구가 장우혁을 좋아하면 나는 강타를 좋아해야 했다. 서로의 남편이라도 되듯 공유하면 안 되는 무언의 룰이란 게 있었다. 은유는 보아하니 블랙핑크의 제니를 좋아하는 것 같다. 제니 옷이 어쩌고 얼굴이 어쩌고 하는 말을 은연중에 귓등으로 많이 들었다. 그런데 정작 물어보면 지수가 제일 좋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제니는 다른 친구가 좋아하는 멤버다. 친구가 좋아하니 제가 좋아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짐작하며 나의 옛날이 그렇게 잠깐 다녀갔다.


걸그룹들이 생산해 내는 부가가치가 전 세계적으로 대단하다. 실력과 국제적인 매너를 갖춘 이들 비즈니스는 탄탄한 팬덤이 형성되면 각종 돈벌이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들 산업의 행태가 꼭 거미를 보는 것 같다. 거미는 밤낮으로 크고 멋진 거미줄을 만든다. 간격도 자로 잰 듯 일정하고 촘촘하고 널찍한 거미줄을 친 거미는 그때부터 일을 하지 않는다. 조용히 뒷방에 손님을 기다리는 것으로 일을 대신한다. 거미줄의 쇼타임이다. 잠자리 같은 날벌레가 오가며 걸리면 한참을 퍼덕인다. 바둥댈수록 더 엉켜 붙는 거미줄에 기진맥진할 즈음, 거미는 다가가서 조용히 즙을 빤다. 거미의 일생에는 잘 쳐놓은 거미줄에 일 년 농사가 달려있다.


여기 상해에 블랙핑크 팝업스토어가 들어섰다. 한국 소프트 파워의 영향력에 감탄한 것도 잠시, 이미 다녀간 잠자리가 공유한 SNS 인증샷에 은유가 걸려들었다. 유동인구 제일 많고 복잡한 도심에, 만성 차 막힘과 주차 대란으로 악명 높은 그곳에 가자니 막막하고 먹먹했다.

- 오늘은 안나가기로 약속했는데?!(엄마) 누구랑?(은유)


대중교통만이 최선이었다. 도시는 배수가 원활하지 않아 곳곳에 웅덩이가 찰랑했다. 운동화 앞코는 이미 젖어버렸고 은유는 꿉꿉한 양말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운동화 축을 구겨 신었다. 가뜩이나 거추장스러운 우산은 대가 온전치 못해 고정하는데 팔 근육을 사용해야 했다. 블랙과 핑크로 치장한 팝업스토어(거미줄)를 직감과 육감을 동원해 은유가 한 방에 찾아냈다.

BLACKPINK IN YOUR AREA

온갖 굿즈로 도배된 스토어.

입장부터 경비가 삼엄하다. 열쇠고리한 개에 한화 2만 원 정도 하니 경비가 허술할 수 없다. 상품과 퀄리티를 보면 일반 제품과 별 다름없지만, 아니 오히려 싸구려에 가깝지만, 블랙핑크 멤버의 캐리커처나 싸인이 붙어있기라도 하다른 이야기가 된다.


재미도 없고 감흥도 없는 나는 구석에 앉아 사람들의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했다. 블핑 멤버가 온 것도, 무대를 본 것도 아닌데 하나같이 상기된 얼굴빛이다. 그 얼굴빛을 제공하는 대가로 벌어드는 돈이 짐작컨대 어마어마할 것이다. 매일 출퇴근에 정신없이 분주한 개미와 백스테이지에서 다리를 꼰 채 잠자리를 보며 입맛 다시는 거미가 그 순간 대조를 이룬다.

하루라도 일찍 은퇴하고 은행에서 다달이 정산해 주는 꿀처럼 달달한 이자를 먹고살 궁리에 오늘도 남편 개미가 바쁘다. 일하지 않고 돈나올 방도를 쉼 없이 계산하는 통에 머리가 핑핑 돈다. 늙어서도 해외여행과 골프를 포기할 수 없는 예비 노인의 지갑 걱정에 오늘밤 잠도 편히 못 이룬다.

하루하루 개미는 거미가 되는 꿈을 꾼다.

개미는 거미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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