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해서 좋았던 추석
평범한 여느 날과 같은 명절을 보냈다. 누군가에게는 조용해서 섭섭한, 누군가에게는 일상처럼 편안한 명절이었다. 명절 전 온전히 하루를 꼬박 부엌에서 보내던 예전과 달리 여느 때처럼 조용히 차를 마셨고 글을 썼다. 남편은 육전이 먹고 싶다고 했지만 손바닥만 한 프라이팬을 가지고 서서 몇 시간을 부칠 생각을 하니 기름 냄새가 역했다. 먹지 못한 육전은 훗날 부부싸움의 소재로 다시 소환될 것임을 안다.(십 년을 넘게 살아보니 이 사람이 어떤 포인트를 가슴에 담는지 대충 감이 온다.) 임시방편으로 한인마트에서 송편을 사다가 입막음으로 쓴다.
추석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집안 모니터에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띄웠다. 조정석 배우가 나오는 영화가 요즘 자주 눈에 띈다.
조정석 배우님이라 여장남자에 관한 이야기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야기는 한 남자가 여성으로 살아가며 겪는 에피소드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서의 삶이 결코 쉽지 않음을 드러내는 플롯을 가지고 있었다. 몇 해 전 뚱녀가 미녀가 되며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외모지상주의에 일침을 가한 '미녀는 괴로워'가 떠올랐다.
여성 승무원을 향한 남성 기장의 외모 칭찬에 대한 한 여성 크루의 반응이 기억에 남는다.
저는 칭찬받을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요.
정확히 말하면, 나는 남편과 결혼을 했다. 다시 말해, 시집과 결혼한 것이 아니었다.
풀어 말하면, 내 결혼 결정에 있어서 시집의 구성원과 재산은 한 푼의 기여도가 없다는 뜻이다. 명절이 되면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하는 도우미 같은 기분이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다. 사위를 백년손님처럼 대하는 친정 분위기에 반해, 나는 시집에서 안주인이라는 그럴싸한 타이틀을 가진 식모와 같았다. 친정집의 부엌도 내 살림이 아니라 라면하나 끓이기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하물며 낯선 부엌에서 종일 서서 음식을 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 많이 참고 견뎌야 하는 시간이 된다.
먼 친척까지 찾아와 당연하듯 밥을 먹고 간다. 일찍 와서 손을 보탤 생각은 작년에도 올해에도 하지 못한 듯하다.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빨리 도망치고 싶은 생각뿐이다.
먹이고, 또 먹였으니, 칭찬받을 일은 누구보다 충분히, 그리고 많이 했다.
저는 칭찬받을 일을 했는데요.
듣고 싶은 말이란 게 있다. 기본적인 대화라는 게 있다.
고기가 질기다. 국이 짜다. 숙주가 오래 삶아 물렀다... 이런 거 말고.
트라우마다.
부엌에서 오랜 시간 서있자면 명절이 자꾸 떠오른다. 기억의 연상 작용으로 이유 없이 억울하고 서글프다. 내게 명절 음식은 음식 그 자체로서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압박감이고, 부담감이고, 반감이다. 그 순간 너무 작고 초라해지는 내 모습에 내가 분노한다. 내가 종인가. 내가 이러려고 공부했나. 제멋대로 뻗쳐나가는 생각의 가지를 끊어내지 못하는 것이 무엇보다 두렵다. 누군가 불 앞에서 땀 흘리며 오랜 시간 만든 음식은 누군가의 입속에서 몇 초 만에 사라진다. 만드는 사람의 시간과 정성과 노력을 존중해야 한다.
식구에게 밥을 해서 먹이는 것은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행위이다. 바라는 게 있다면, 그 귀한 행위는 함께 하고 싶다. 때문에 나의 다음 집은 거실보다 부엌이 반드시 커야 한다. 음식은 자고로 함께 지지고 볶는 맛이다.
명절이 평범해서 좋았다.
남편의 짜파게티가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