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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Oct 23. 2024

까만 하늘

존재 

아장아장 걷는 발걸음 뒤에 따라오는 발걸음이 있다. 가만히 있질 못하는 아이의 걸음에 한 발짝 늦게 움직이는 손가락. 카메라 조작하는 할머니의 손가락이 둔하다. 뒷모습까지도 놓칠세라 셔터를 누르는 할머니의 얼굴에 꽃이 가득 피었다. 



어린이집 원복을 입은 아이는 할머니의 마음을 아는지 걷는 내내 그 총명한 눈으로 곳곳을 탐구한다. 그 눈에 보이는 모든 초록과 분홍이 단순히 색깔만은 아닐 것이다. 뒤에 따라오고 있는 어른이 있으니 맘 놓고 구경도 하고 해찰도 한다. 


원복을 입은 아이를 보고 있자니 나의 그 시절 숨 가쁜 엄마 노릇이 떠오른다.

아이의 유치원 등록기간에 우리 부부는 노트북 두 대로 전투태세를 갖추고 인터넷이 가장 빠르다는 커피숍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오전 10시 땡 하면 열리는 등록 페이지에 20가지가 넘는 개인 정보를 입력하여 100명이라는 모집 인원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전투 목표였다. 예상되는 정보를 미리 엑셀 파일에 정리를 해두어 필요시 복붙을 할 준비까지 마친 사이, 시간은 당도하여 손가락과 눈이 일심동체가 되었다. 

긴박함이 감도는 4분. 

내가 먼저 제출 버튼을 누르며 100명 중 83번째라는 번호표를 낚아챘다. 남편이 제출을 마쳤을 때는 이미 100명을 채운 후 페이지가 문을 닫은 상태였다. 문밖에서 서성이는 수많은 학부모들의 아우성에 나는 로또 복권과 같은 번호표를 받아 승리의 깃발처럼 흔들었다. 


며칠 후 진행된 학부모 면접. 

교사는 내게 학교에 무엇을 공헌할 수 있는지 물었다. 번호표만으로는 부족한 유치원 입학이다. 

돈 많은 집은 무엇 무엇을 기부하겠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사람을 보내 일손을 돕겠다고 했다. 가진 게 별로 없는 나는 몸으로 때우겠다는 말을 전투력 넘치게 전했다. 입학 후, 나는 환경 정리 때마다 학교에 불려 다녔다. 벽보를 색칠하고, 꽃장식을 붙이고, 바자회에 물건을 판 덕분에 아이는 유치원 3년을 감사히도 무탈하게 보냈다. 



시골길을 걷다가 시멘트 벽돌로 무심하게 세워진 벽을 마주쳤다. 깨진 병의 뾰족한 얼굴을 나란히 세운 다른 집 담벼락과는 달리 꽃과 식물로 그 간격도 일정하게 놓인 앙증스러운 화분을 보며 미소가 떠올랐다. 

투박한 자식을 섬세하게 돌보는 부모의 마음이 느껴져서랄까. 

배경이 되어 빛을 내주는 작은 생명들이 사진기를 불러오는 소박하며 고운 벽을 만들었다. 화분이 내뿜는 생명력은 벽돌과 벽돌 사이의 아슬아슬하게 벌어진 공간을 꼭 붙들어주고 있었다. 그 칙칙한 벽은 어떤 예술인의 손길이 닿은 조형물로 보이기도 했다. 작은 잎들에 매일 아침 물을 주는 주인장의 사랑이 한낱 한 장 벽을 생기로 메웠다.


존재 자체로 상대를 빛나게 해주는 이들이 있다. 애초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우리는 순간순간의 역할에 집중할 뿐이라고 말한다. 내가 받은 사랑은 그렇게 다른 이를 통해 흘러간다. 한때는 나도 빛났음을 기억할 때 다른 상대로 전해지는 사랑이 아깝지 않다. 전혀 아깝지가 않다. 그 자체로 나의 목적이며 나의 기쁨이 된다. 


존재 자체로 상대를 빛나게 해 주었던 사람들이 여기에 또 있다. 한동안 한국을 춤 열풍으로 몰아넣은 스우파(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그렇다. 파이터라는 단어가 주는 터프함에 기존의 여성 개념을 연결하니 모호하여 더욱 눈길이 갔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는 듯, 국가적 슬로건 말마따나 전국적으로 신나고 흥이 나는 '다이내믹 코리아'는 세계를 흔들어 놓았다. 

춤꾼을 비하하던 모든 이의 시각을 180도 바꿔놓은 스우파. 

우리는 이제 그들을 백댄서라는 무식한 콩글리쉬로 부르지 않게 되었다. 배경 댄서, 백업 댄서, 보조 춤꾼... 이 아닌 스스로 빛나는 댄스 크루들이다. 


'백댄서'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뒷배경을 채우면서 춤을 춘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백업 댄서 일을 하는 스트릿 기반의 댄서'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는 영어 원어 그대로 백업 댄서로 쓰기를 권장하는 편이다. 백댄서와 달리 백업댄서라는 호칭은 가수와 호흡을 맞추며 무대를 백업(보조)해준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영어권에서도 backup dancer와 함께 background dancer라는 표현도 사용하는데, 후자 역시 '백댄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배경 댄서라는 의미에 가깝다. [나무위키]


단순하게 뒷배경을 채우는 춤꾼으로만 여겨진 그들의 일은 사실 그 이상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인체를 연구하고 동작을 연구한다. 모션이 만들어내는 비언어적 메시지를 궁구한다. 안무를 만들어 가수를 훈련하고 무대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그들을 우리는 전문성을 겸비한 예술인으로 여겨야 마땅하다. 그들을 폄하하며 따라다닌 언어의 괴롭힘이 자연스럽게 우리들 입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별(스타)을 빛내기 위해 묵묵히 있어준 까만 하늘이다. 까만 하늘에게 주목하고 열광하는 시선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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