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한 短想_8

바람의 그림자_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by sinwolrang

한동안 난 한강 작가의 소설과 시집에 심취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작품을 모조리 읽어 보기"란 목표를 세우고 구매하거나 도서관 대출을 통해 한 권씩 격파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을 읽어갈수록 내 안의 에너지가 점점 소실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을 때는 물론이고 마자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도 그 잔상들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힘 없이 아파해야 했다. 나는 이렇게 얼음 같은 책만 계속해 읽다가 우울증에 빠지거나 책 속에 바글거리는 고통의 수렁 속에 빠져 버릴까 두려웠다. 벗어나고 싶었다, 잔뜩 먹구름이 드리운 곧 차갑거나 뜨거운 무언가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마음과 감정에 무언가 조금은 따스한 것이, 사이다 같은 청량한 바람 같은 게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경로들을 통해 찾은 도피성과 같은 책이 스페인 작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였다.


스페인 바르셀로나가 주 배경인 이 소설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마법 같은 문장들로 가득한 언어유희적 소설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스토리 보다 내 마음을 끄는 건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던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이 소설이 영화로 제작되어 엄청난 흥행을 거두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는다 해도 난 절대 그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그 영화에 실망하게 될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과 독특한 표현력으로 쓰인 문장들이 감광지와 같은 감수성이 풍부한 독자를 만난다면, 그들 몸의 모든 감각 기관을 모조리 깨워 내 마치 자신이 투명 인간으로 그 소설 속 현장에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게 될 것이다. 내가 영화에 문외한이긴 하지만 작가의 문장들의 디테일과 은유와 해학을 영화나 드라마로 연출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등장인물들 간에 펼쳐지는 사랑과 헌신, 증오와 폭력, 엇갈린 운명... 등 일반적인 소설들이 다루는 주제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한 소년이 잊힌 책들의 묘지에서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는 독특한 이야기 전개는 꽤 인상적이었다. 특히 소설 속 등장인물 중 "홀리안이 작가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자신이 직접 자기가 쓰고 있는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 소설 속 전체 이야기를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점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초반엔 스페인 바르셀로나 배경의 낯선 지명과 인명이 쉽게 기억되지 않거나, 문화적 지리적 차이에 의한 인용구들의 이해가 많이 어려웠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모든 게 익숙해지며 소설 속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책 읽기를 마친 후에야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이 2021년 6월 12일 55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머리에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가 담겨 있었을 텐데, 반짝이는 별들처럼 수많은 이야기의 씨앗들이 싹트길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안타까움이 파도차럼 밀려왔다.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중 아직 읽지 못한 "영혼의 미로"는 한강 작가의 남은 책들을 다 읽고 난 후 너덜 해진 마음을 부여잡고 필히 읽어 보리라.......!

오늘 밤 나는 곰처럼 웅크리고 앉아 "글들의 무덤 속"에나 들어갈 글을 휘갈기고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세상 참 넓더라!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