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듯하게 자른 앞머리에 큰 키. 대학교 첫 수업 시간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누가 봐도 학생의 얼굴인 그는 책상에 앉지 않고 강단에 섰다. 크리스티안. 1학년 ‘스페인어 글쓰기와 표현’ 수업을 맡은 교수였다.
그는 사실 대학원생이다. 대학교에 늦게 입학한 편인 나와는 두 살 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기존에 있던 교수가 임신으로 자리를 비우자 크리스티안이 임시 교수가 됐다. 교수의 뜻이 없는 그에게 우리는 첫 제자이자 마지막 제자가 될 것이었다. 크리스티안은 약 100명이 넘는 학생 이름과 얼굴을 이틀 만에 다 외웠다. 몇몇은 출신 지역까지 단번에 외웠다. 열정으로 가득 찬 그에게 나는 꽤나 신경 쓰이는 학생이었다.
나는 적당히 뒷자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오리엔테이션 당시 교수들의 시선은 나에게 몇 초간 머물렀지만 특별한 언급 없이 넘어갔다. 크리스티안 역시 그러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열정이 넘치는 젊은 교수였다. 그는 나에게 이름과 국적, 스페인어 실력을 물으며 다음부터는 맨 앞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다음날 그의 친절이 과하다고 생각한 내가 앞에 앉지 않자, 그는 나를 불러 앞자리에 앉히고서야 수업을 시작했다.
처음 몇 주간 나를 흘깃 보고 수군대는 이들이 꽤 있었다. 방금 전 크리스티안이 큰 소리로 “한국에서 왔구나”라고 되짚었는데도 불구하고, 앞쪽에서 나를 두고 “중국인이냐”는 소리가 들렸다. 그 친구는 수업시간에 굳이 뒤돌아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우리에 갇힌 동물이 이런 기분일까. 나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며 절대 쳐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아니었다. 크리스티안은 그걸 어떻게 다 보고 듣는 것인지, 하루는 “타지에 홀로 와 공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 줄 아느냐. 대단한 친구이다”라며 나를 대변했다.
나는 나의 고충을 알아주는 크리스티안이 고마우면서도, 다른 이들의 눈총을 한 번 더 받게 만드는 그가 조금 미웠다.
크리스티안은 수업 중간, 쉬는 시간, 끝나고 나서 항상 나에게 수업이 어떤지 물었다. 조금이라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질문하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내가 질문을 하러 찾아가면 그는 한 시간이 넘어가도 개의치 않으며 설명했다. 내 문장력을 키우기 위해 남들보다 두 배의 작문 과제를 내주기도 했다.
그는 내가 유일한 외국인으로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워한다는 점을 눈치챘다. 또, 다른 이들이 내게 다가오는 걸 어려워한다는 점 역시 알았다. 그 수업엔 3개월의 준비 기간이 있는 조별과제가 있었다. 크리스티안은 나름 학생들을 분석해 직접 조를 짰다. 그는 수업 참여도, 점수에 대한 의욕이 높은 친구들과 나를 한 조에 넣었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조원들이 어떤지 물으며 “네가 적응하는데 도와줄 수 있는 친구들이다”라고 말했고, 우리 조가 크리스티안이 나를 위해 구성한 조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눈은 정확했다. 친구들은 처음엔 조금 어색해했지만 이내 나를 반겼다. 이후 우리는 같이 등하교를 하고, 밥을 먹고, 과제를 하고, 여행도 갈 만큼 가까워졌다. 크리스티안 덕분에 친구를 사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친절은 고마웠지만 부담스럽기도 했다. 교수가 한 명의 학생을 과하게 신경 쓴다는 점이 걸렸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크리스티안은 나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나와 다른 범주의 이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을 것이다.
크리스티안은 한 학기가 끝나고 다시 대학원으로 돌아갔다. 어찌 됐든 나는 그 덕분에 스페인어 실력이 많이 늘었고, 학교에도 ‘동기’가 아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