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나를, 나도 아버지를.
"형, 아빠 지금 심각해. 길병원이야. 가급적 빨리 인천으로 와."
"무슨 일인데? 왜, 어떤 상황인 거야?"
"아빠 병원 가시는데 걷는 걸 너무 힘들어하셔서 내가 모시고 갔었거든? 그런데 거기 의사가 발가락 잘라야 한대."
"무슨 소리야. 아빠 병원 가셨을 때 거기 의사는 괜찮다고 소독만 잘하면 된다고 했다는데."
"그게 말야. 아빠가 아무래도 병원에 안 가셨는데 가셨다고 거짓말을 하신 거 같애."
어떤 사람이 그랬다.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C(choice)가 존재한다고. 인간의 삶의 단면을 잘 설명해 주는 말인 듯하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은 그저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지는 존재다. 그리고 꿩 새끼 모냥 대가리를 풀숲에 박아버렸던 나. 폭탄은 동생 앞에서 터졌지만 그렇다고 그 폭발을 피한 것은 아니었다. 가족은 그런 것이다. 폭탄이 아무리 멀리서 다른 가족에게 터졌다고 해도 폭발의 반경 안에 나도 언제나 함께였다. 만약 내가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면 아버지의 상태가 조금은 괜찮았을까. 병신같은 내 선택에 욕지기가 나왔다. 아버지의 상태는 심각했고 왼쪽 엄지 발가락은 당연히 절단해야만 했고 발가락에서 끝날 것이냐 발목까지 올라가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꽤 많은 검사와 시술을 하면서 아버지의 몸 속에 숨어 있었던 온갖 문제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작은 산 하나를 넘으면 더 큰 골짜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이제 평지인가 싶으면 늪이었다. 그렇게 수개월을 아버지와 나 그리고 동생은 병원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미안하면 오히려 더 화를 내는 부류들이 있다. 우리 아버지가 그렇다. 아버지 당신의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는데 그 선택이 불러온 결과들을 아버지는 도무지 어찌할 줄을 모르셨다. 사라진 엄지 발가락을 보면서 느꼈을 우울감과 없는 살림에 보험 하나 들어놓지 못해 열흘에 이삼백만 원이 드는 병원비, 엄마도 몸이 약해 나나 동생이 직장에 가면 홀로 있어야 하는 병원 생활까지, 아버지는 당신이 어쩌지 못하는 상황들 하나 하나에 화가 나신 듯했다. 차마 이런 이야기들은 하지 못하고 못내 마음에 안 들었던 병원밥, 주삿바늘을 제대로 놓지 못하는 간호사,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는 병실의 온도 이 모든 것들에 화를 내기 시작하셨다. 그 감정을 오롯이 받아내야 하는 건 집안의 첫째였던 '나'였다. 가끔은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육두문자가 섞인 욕설로 자신의 분노와 절망 그리고 우울함을 표현하셨다. 가부장적이시고 고리타분한데다가 엄하디엄하시긴 하셨지만 상스러운 말로 감정을 표현한 적은 없으셨는데 당시 병원에서 만난 아버지는 너무나 이질적이셨다. 괜찮게 지내시다가도 무엇 하나 마음에 안 드시는 게 발견되면 다른 사람처럼 나를 노려보시고는 욕지기를 토해내셨다. 내가 아는 아버지와 전혀 다른 아버지의 행동이 나를 참 힘들게 했다. 그러나 그런 힘듦도 내게는 사치였다. 만약 내가 알아챘던 그 순간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했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에 나는 그저 아버지를 껴안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임용고시를 준비했을 때였던가...
집안에서 첫째였던 나는 기울어진 집을 다시 세워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자신이 입어야 할 것을 입지 못하셨고 당신들께서 잡수셔야 했던 것들을 모두 나와 내 동생의 입에 넣어주셨다. 아버지와 어머니 당신의 삶을 우리에게 되물려주지 않기 위해 정말 많은 것들을 포기하셔야만 했다. 젊음과 삶을 다 우리 형제에게 올인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임용고시의 결과는 내 인생의 전환점일 뿐만 아니라 인생을 올인을 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두 번째 시험 결과를 나보다도 더 고대하며 기다리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불합격 통보.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우셨다. 이제 어떻게 하냐고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우셨다. 내 실패는 내 실패에서 그치지 않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실패였고 우리 집안의 실패가 되어버렸다. 어머니의 울음 소리와 그동안 못내 서운했던 내 행태들을 하나씩 던지기 시작하셨다. 그 때,
"그만 좀 해. 제일 힘든 건 이놈이구먼 뭘 그렇게 울고 그려."
그러고는 내 손등을 그 다음으로는 내 등어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많이 힘들었지? 괜찮어, 그럴 수도 있지. 니가 애썼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다 괜찬혀. 천천히 쉬면서 다른 일 찾아보믄 되지. 다 괜찬혀. 공부하느라 욕봤다."
후두둑. 그동안 묵혀왔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나도 슬프고 힘들었구나. 나도 시험에 떨어진 게 정말 힘들어 아팠었구나. 아버지의 위로 한 마디에 나는 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내 모든 공부가 허사가 되었다는 사실, 부모님이 원하시는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큰 실패까지, 미처 몰랐던 온갖 아픔들이 올라와 아버지 앞에서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대여섯 살 이후 그렇게 소리내서 우는 걸 처음 보셨던 아버지는 그저 내 등을 조용히 쓸어주고 계셨다. 괜찮다고, 괜찮은 거라고. 별일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