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삼시세끼와 간간한 반찬 그리고 술 한 잔은 '신앙'이셨다.
엄지 발가락을 잃어버린 일은 아버지에게는 큰 상실이었을 터. 그 상실은 당장 일상생활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라진 엄지 발가락을 대신헤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비록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당뇨약도 철저하게 드시고 나름대로 건강도 챙기시려고 무던히 애쓰셨다. 다만 아버지의 방식과 의사가 권장하는 방법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당연하게도 아버지의 편은 아니었다.
나는 가끔 어르신들의 근거 없는 자신감에 혀를 내두르곤 한다. 당뇨 환자가 먹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인 술은 심신의 안정이라는 명목 하에 허용되었고 술 한 잔도 하지 못하는 인생은 아무런,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절대 양보하시는 일이 없었다. 간이 확실하게 배어있지 않은 반찬은 한 입도 대시질 않으셨고 더 나아가 때로는 반찬투정까지 하실 정도였다.
"사람은 모름지기 삼시세끼 잘 먹어야 건강해지는 법이여. 이 정도는 먹어야 건강해진다니까. 그리고 간이 간간해야 밥이 넘어가지 당뇨환자들 먹는 것처럼 먹다가 오히려 굶어죽기 십상이다. 지금처럼 먹어도 안 죽어, 걱정 마."
"아빠, 그렇게 드셔도 안 돌아가시겠죠. 대신 오래 아프실 수 있어서 그러는 거죠. 큰 수술한 지 얼마 됐다고 진짜... 이러다 큰일 나요."
조곤조곤 말씀드리다가 때로는 언성을 좀 높여 말씀을 드려보지만 결국 아버지는 어린 아이처럼 삐치시고는 산다면 얼마나 산다고 이런 즐거움까지 빼앗느냐고 되레 나에게 화를 내시며 막돼먹은 자식놈의 새끼로 끝을 맺었다. 매번 집에 갈 때마다 아버지와의 싸움은 계속 되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흰 쌀밥과 졸아붙은 김치찌개에 소주를 두어 병 잡수시고 계셨고 엄마는 옆에서 국수를 삶고 계셨다. 아버지와 실랑이가 벌어졌고 급기야 집에 온 지 몇 시간도 안 되어 짐을 싸서 다시 일터가 있는 서산으로 내려간 일도 있었다. 발가락 하나를 잃으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기어이 자기 고집대로 근거 없는 자신감에 휘둘려 막 사시는 아버지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번 상한 마음은 모든 논리와 예의를 마비시킨다. 서산으로 내려가는 길, 엄마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못 배운 티를 내는 거라고, 무식한 거라고 말이다.
아버지와 그렇게 좋은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엄마는 아버지의 아내였다.
"그려. 화가 나지. 맞어. 니 말 하나도 틀린 거 없지. 그런데 니 아빠나 나나 잘 기억도 안 나지만 전쟁을 겪었어. 어릴 때 하루 세 끼가 뭐냐. 굶는 게 일이었어. 게다가 니 아빠 막내다 보니 형들한테 치여 뭐 제대로 먹고 자랐겄냐. 그리고 너도 알지? 니 아빠 소아마비였던 거. 그러니 제대로 먹였겄어? 언제 죽어도 당연한 거였지. 그렇게 살어서 그려. 너무 뭐라고 허지 마. 어떻게 보면 이 아빠 참 불쌍한 사람이여."
"한 번 놓친 끼니는 절대로 돌아오지 벱이다, 밥부터 챙겨 먹어."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내가 잔뜩 떨어진 성적표를 가져와도 화 내시는 법은 거의 없었다. 자잘한 사고를 쳐도 잠깐 언성만 높이셨지 뭐라고 하시는 법이 없으셨다. 그러나 밥상에 앉아서 깨작대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학교 끝나고 아버지의 양화점에 들르면 아버지는 늘 '밥 먹었냐'고 인사를 대신하셨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임용고시 학원을 다닐 때였나. 일단 공부만 하고 싶어서 있는 돈을 쪼개고 쪼개서 쓰다 보니 저녁은 집에 가서 먹고 아침과 점심은 초코바로 때웠다. 아홉 시 수업, 좋은 자리를 맡으려면 최소한 7시 반에는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공부를 해야 한다. 전철에서 내려 학원 근처 슈퍼에서 초코바를 하나 산다. 그리고 그 초코바를 딱 반으로. 쪼개 아침 식사용으로 반을 먹는다. 나머지 반은 점식 식사가 된다. 그러던 어느날 학원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 시간이 되었는데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나 일이 있어 노량진에 왔는데 밥 먹었냐? 온 김에 아들 얼굴도 보고 밥도 먹고 갈라고 전화했다."
깜짝 놀라 얼른 노량진역에 가보니 아버지가 서 계셨다. 양화점에서 입으시는 작업복 비스무리한 것을 걸치고 나를 보자 웃으시며 손을 흔드셨다. 오랜만에 구두를 한 켤레 만들어야 하는데 거기에 필요한 피혁이나 재료들을 사러 오셨다고 하셨다. 점심 시간은 짧다. 아버지와 나는 근처 콩나물 국밥 집에 들어가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콩나물 국밥을 비웠다. 부자지간에 살가운 말들이 오가기가 쉬운가. 공부 잘하고 있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네, 한 마디.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거냐는 물음에 나는 그럼요, 한 마디. 아버지와 아들의 짧은 점심 시간이 끝이 났다. 아버지는 전철을 타고 다시 인천으로 가셨고 나는 학원을 향했다. 참 뜨신 국밥이었다. 오랜만에 국물과 밥이 동시에 들어가서 그런지 든든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을 때였나, 아버지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들었다.
"노량진에서 먹은 그 콩나물 국밥 기억나냐? 나는 그게 참 맛이 없었는데 너는 그렇게 맛있게 먹더라. 사실 그날 새벽에 너 나가고 나도 바로 따라 나갔었다. 니 밥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궁금혀서. 밥도 안 먹고 들어가나 싶었는데 니가 슈퍼에 가서 쪼코바 하나를 반으로 쪼개서 그걸 먹고 학원으로 들어가는데 차마 너를 못 부르겠더라. 그냥 가게를 못 가겠더라고."
아버지에게 신앙과 같은 삼시세끼를 아들이 제대로 못 챙겨먹는 건 아닌가 싶어 따라나오신 것이었다. 그리고 초코바 반쪽을 아침이라고 입 속에 넣고 학원에 들어가는 나를 보시고는 차마 발걸음을 떼실 수 없었다고 하셨다. 혹시 학원에서 다시 나와 밥이라도 챙겨먹으려나 싶어 학원 앞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니 사람들이 우르르르 나오는 걸 보고는 점심 때라는 것을 짐작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나에게 전화를 거셨고 그렇게 부자는 함께 콩나물 국밥을 점심으로 나눴다. 아버지 입맛에는 맞지 않았던 그 콩나물 국밥을 아들인 내가 맛있게 잘 먹는 걸 보면서 더 마음이 시리셨다고, 이 맛 없는 게 맛있게 느껴질 정도로 굶고 다녔구나 싶어 억장이 무너지셨다고 하셨다.
마흔다섯이 된 지금도 나는 그 때 아버지와 먹었던 콩나물 국밥의 맛이 혀에 감돈다. 북어로 우려내 간간하고 뜨끈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흐른 후 느껴지는 시원함, 적당하게 잘 씹히는 밥알은 국물에 적당하게 불어 다 씹지 않아도 훌훌 먹혔던. 그런데 문득 내가 진짜로 그날의 국밥이 맛있었던 이유는 콩나물 국밥이 맛있어서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밥 한 끼의 여운이었을까 아니면 밥 한 끼에 목숨을 거는 아버지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