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가 원하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했다.
발가락 없이 사신 지 약 2년째 되던 이천십구년 겨울, 결국 아버지에게 위기가 한 번 더 생겼다. 갑자기 온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셨고 다시 한 번 병원 신세를 지실 수밖에 없었다. 당뇨가 한 번 더 아버지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앞으로의 일을 예언하듯이 이 일이 있기 며칠 전, 나는 또 한 번 꿈 속에서 아버지의 양화점을 부끄러워 했었고 아침에 일어나 마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언제까지 나는 부끄러움 속에서 살아야만 할까, 마음이 무너지는 중 아버지의 입원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다행히 동생이 집에 있었고 그 덕에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으로 내달릴 수 있었다. (관련글 : 1. 아버지의 양화점) 지난 번 당뇨족으로 인한 큰 수술을 받으신 후부터 몸은 급속도로 녹슬어가기 시작하셨다.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신장은 다양한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 중 하나가 가려움이었다. 이 가려움에 늘 고통스러우셨던 아버지는 당신의 몸을 피가 나게 긁기 시작하셨고 긁은 곳마다 상처는 아물지 못하고 흉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뿌리를 얼마나 강력하게 내렸는지 아버지의 몸에 뿌리내린 고름을 뽑아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아버지의 몸은 쉬이 아물지 못했고 아버지는 가려움에 잠을 못 드시거나 혹은 염증이 내리는 열기에 잠을 못 드시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 하나 더. 외로움에 잠을 들지 못하시기도 하셨다.
코로나가 심해지고 있어서 병원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던 당시 아버지는 간병인에게 몸을 맡겨야 했는데 거기에 적응하시는 데 꽤 시간이 걸리셨다. 당연히 엄마와 나 그리고 동생이 당신을 돌보실 거라고 생각하고 계셨는데 현실적 이유로 그러지 못하자 아버지는 점점 더 어린 아이처럼 생떼를 부리기도 하셨다. 일곱살이 되어버린 일흔 넘은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낯설고 낯설었다.
"반찬 뚜껑 좀 열어줘. 나 손 움직이는 게 힘들다. 저기 고기 반찬 좀 집어줘."
"오늘 반찬이 다 마음에 안 든다. 안 먹을란다."
"몸에 로션 발려줘."
"나 등이 가려워. 좀 긁어라."
간병인이 있는 병실에 계셨지만 나나 동생이 가면 아버지는 늘 일곱 살의 어린 아이가 되어 계셨다. 어쩌면 아프신 분의 당연한 요구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요구는 이상하게도 간병인에게는 한 번도 향하지 않았다. 오히려 간병인이 당신 몸에 손이라도 댈라치면 몸소리치게 화를 내시곤 하셨다. 가족에게는 허락되지만 타인에게는 허락될 수 없는 영역. 그러다가 가족이 없는 밤이 되면 아버지는 외로움에 분노하셨다.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분노.
"다 필요없다. 니 엄마는 뭣하고 있길래 코빼기도 안 보여. 너도 그래. 자식새끼들 다 필요없다더니."
아버지의 분노는 차갑고 아프고 슬펐다. 아플 때 당연히 자신이 아플 때 직접 간병해 주고 돌봐줄 거라고 생각했던 아내, 아들 둘은 현실적인 근거를 들이밀며 아버지 당신을 피하고 있다고 생각하셨다. 그게 우리 아버지 세대의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사고방식이었으리라. 그러면서도 아버지 마음에 여유가 좀 들면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미안해 하셨다. 입원하는 동안 드는 병원비며 간병인 비용 등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아들 둘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당신을 돌봐주고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분은 아니셨다.
그저 아버지는 부끄러우셨을 뿐이고 외로우셨을 뿐이며 아버지가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자괴감 때문에 더 힘드셨을 뿐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이런 감정을 채 읽어내는 법을 모르셨기에 그저 '분을 내시고 화를 쏟아내시는 것 뿐이다.
그래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들 또한 피해자이자 희생자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태권도 학원을 다녔을 때, 한 친구가 장난으로 나를 밀어서 넘어졌는데 하필 거기 유리가 있었다. 내가 넘어지며 유리가 깨지게 되었고 삽시간에 바닥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꽤 많은 피를 흘려서인지 나는 힘 없이 누워있었고 피는 방바닥을 거의 다 칠하고도 남을 정도로 방을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뒤로 나를 안고 주무시는 아버지가 계셨다. 어떻게 병원에 실려갔는지 어떻게 수술을 하고 치료를 받았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심지어 퇴원하던 날도 내 기억에서 찾을 수가 없다.
그저 눈을 떠보니 좁은 병실 침대 위에서 나를 껴안고 주무시던 아버지만 기억이 난다. 아버지의 뒤로 병실 창문이 있었고 그 창문 틈 사이로 찬 기운이 계속 들이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