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그 때 우리 많이 아팠어요.
아버지에게는 장모이자 엄마에게는 '자신을 낳아준 엄마' 그리고 나에게는 외할머니셨던 분은 두 번의 수술을 거치시고 거동도 많이 불편해진 상황이 되시고 말았다. 그 무수한 시간이 흐를 동안 우리는 철저하게 남이었고 남답게 그 어떤 연락도 오가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평온했으나 엄마의 회복되지 않는 상처는 점점 더 곪아가고 있었다. 엄마는 그동안 엄마 명의로 된 것 하나 없는 '송씨 집안'을 그러려니 버티셨지만 이 때를 시작으로 엄마의 마음도 병들어 가기 시작했다. 성심성의껏 구두를 만들고 고치겠다는 아버지의 마음과 달리 세상은 더이상 양화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은 네 식구가 생활하기조차 벅찬 정도가 되었다.
군입대 후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나는 세상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살집도 있으시고 동안은 아니셨어도 최소한 엄마의 나이로 사람들이 알아봐줬었는데 100일 휴가를 나왔을 때 만난 엄마는 살이 많이 빠져 피골이 상접한 노파의 모습을 하고 계셨다. 인사를 잊고 그만 나는 엄마에게
"엄마, 엄마 무슨 일 있었어요? 왜 이렇게 말랐어요. 어디 아프셨어요? 엄마 왜 그래..."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나에게 엄마는 울음을 터트리셨다. 군 생활 유일한 안식처라 생각했던 우리집은 거의 풍비박산이 난 상태였다. 엄마의 말씀은 이러했다. 내가 군 입대를 하자마자 아버지는 엄마에게 이제 아이들도 다 컸고 첫째도 군대 갔으니 나가서 돈을 좀 벌어보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거기에 다른 집 여자들과 비교를 하시며 다른 집 여자들이 어떻게 돈을 벌어오는지 상세하게 안내를 해주셨다고 한다.-그 안내라 하는 것들은 분명 아버지의 친구라는 작자들이 아버지를 도와준답시고 코치했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크나큰 말실수로 대미를 장식했다.
"요즘 폐지를 주워도 팔면 그게 돈이 좀 된다네. 어떻게 운동 삼아 그거라도 해보면 어떻겠는가."
엄마는 아버지의 말씀에 거꾸러질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사실, 누구보다 배포가 컸고 장사를 했거나 직장 생활을 하셨으면 누구보다 승승장구할 스타일이셨다. 결혼을 하시면서 '여자가 집안 팽개치고 바깥일 하는 것 아니라'는 아버지의 지론에 따라 하시던 일도 다 정리하셨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동생을 위해 살기 시작한 엄마를 두고 외가 식구들은 많이 아쉬워하셨다. 얼마 안 가 아버지의 양화점으로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것을 아주 일찍부터 알아채고 조금 더 전망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던 엄마는 늘 아버지의 '어디 여자가 함부로... 바깥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가 어디...!!' 이 말에 부딪쳐 좌절하시고 말았다. 아버지에게 엄마는 그저 가정에 충실하고 아이들 잘 기르는 전형적인 엄마의 모습만을 원하셨다. 그러던 아버지가 막상 아들 둘을 어느 정도 키워놓고 나니 나가서 폐지라도 주워 돈을 벌라고 하시니 엄마의 억장은 천만 번도 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그날 내 앞에서 울음을 토해내셨다. 몇 시간을 그렇게 울고 토하고 울고 토하며 기어이 또 빠르게 늙어가셨다. 내가 백일 휴가를 나온 날부터 누구도 엄마를 아줌마라고 부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엄마를 '할머니'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유독 운이 안 좋으셨다. 친구 운도 참 안 좋으신 편이다. 무엇보다 ....
정읍에 있던 작은 건물을 팔고 인천으로 올라오는 날, 엄마는 그렇게 우셨다고 한다. 얼마 안 가 아버지가 헐값에 판 그 건물의 값은 수십 배가 올랐다.
인천에 올라오며 주택을 샀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아버지는 그 집을 팔아 일단 장사를 시작하자고 하셨다. 엄마는 집만큼은 파는 게 아니라고 차라리 당신께서 일을 해보시겠다고 그렇게 말리셨지만 '어디 감히 여자가, 여자 말을 들으면 삼대가 망하는구먼.' 이 강력한 말씀에 어쩌지 못하셨다. 그리고 또 몇 년 채 되지 않아 거기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헐값에 팔았던 그 집값은 수십 배가 뛰었다. 이후 아버지가 결정하시는 일들은 족족 빛을 보지 못하셨다. 아버지의 결정은 혼자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른 집들의 가장들과 술 한 잔 기울이며 결정한 일들었다. 남자들의 결정, 집안을 책임지는 가장들의 결정이었다.
.... 무엇보다 진짜 들어야 할 말들을 듣지 않는 고집스러운 '귀'를 가지고 계셨던 것이 큰 불운이었다. 아니면 그런 귀를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시대가 불운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