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도 '편'이 필요했다.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입원해 계신 아버지를 만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느낄 수 있는 이 냉랭함은 사십 년 넘게 함께 살아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논리를 뛰어넘는 그 무언가였다. 엄마는 지금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입원해 계시고 지방에서 일을 하는 두 아들이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는 것을 분명 머리로는 이해하고 계셨지만 그와 별개로 엄마는, 나와 동생에게, 무언의 분노를 쏟아내고 계셨다.
우리집에는 송씨 성을 가진 남자 셋과 유씨 성을 가진 여자 하나가 산다. 기울어버린 저울추임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것은 정말 아버지를 쏙 빼닮은 동생-애니어그램 8번 유형이 확실하고도 남는 녀석-과 정반대로 섬세하고 여성성이 다분한, 혹자는 형이라기보다는 누나에 가까운 내가 있어서 얼추 균형을 맞춰가고 있다. 가부장제가 확실한 시대에 살았다면 아버지를 능가하고도 남았을 동생은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이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아버지들을 닮았다. 다만, 그 책임감만큼이나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안 되는 남자여서 엄마와 나는 동생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편은 아니었다. 중요한 문제 앞에서는 동생이 든든하고 힘이 되지만 늘 머리를 조아리고 받들어야만 할 것 같은 권위적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엄마와 나는 아버지 못지 않게 살얼음을 걷는 듯, 불편했다. 엄마와 내가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할라치면 동생은 그런 엄마와 나를 정말 흉물보듯 쳐다봐서 나와 엄마는 절대 동생 앞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꺼내지 않는다. 물론, 흉을 보는 엄마나 나나 건강한 선택은 아니지만서도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살아남는 방식이랄까, 그렇게 우리집은 엄마와 내가 한 편, 아버지와 동생이 한 편을 먹는 게 거의 불문율이다.
동생은 안타깝게도 엄마에게서 느껴지는 냉랭함과 서늘함을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동생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예상치 못한 기분 나쁜 소나기와 같은 것이었다. 동생이 기분이 좀 좋은 날은 그저 빨리 지나가기를 손꼽아 기다리거나 조용히 약속을 잡고 나가버리지만 동생도 기분이 안 좋은 날이면 동생 역시도 짜증섞인 표정과 말투로 엄마가 보내는 무언의 메세지를 묵살하며 되받아치곤 했다. 그런 날이면 이 집안에서 엄마를 유일하게 이해하는 내가 나설 차례다.
"엄마, 오늘 엄마 표정이 안 좋네?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00이가 또 이상한 말 한 거야? 아니면 아빠한테 잔소리 폭탄이라도 날아왔어?"
"됐어. 무슨 일은 무슨 일. 아무 일도 없었어. 내가 뭐 잘하는 게 있다고 일이 생기겠어. 신경 꺼."
"엄마, 앉아봐. 왜 그래. 괜찮으니까 천천히 말해봐. 누가 또 엄마보고 뭐라고 그랬나 보구먼. 에이, 00이랑 아빠 하루 이틀인가? 궁금해 미치겠다."
오늘은 쉬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신다. 째깍째깍. 그래도 곧 폭탄이 터질 것만 같았다. 째깍째깍.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면 그동안 꾸욱, 꾹 참아왔던 엄마의 감정이 터질 차례였기 때문에 나 역시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째깍째깍. 아무리 엄마를 잘 이해하고 엄마의 감정을 잘 수용한다고 해도 엄마가 꺼내놓는 감정의 폭탄은 확실히 나에게도 내상을 입힌다. 째깍째깍. 조용히 기도를 읊조린다. 하나님, 제 마음이 엄마의 마음과 감정을 잘 껴안게 도와주세요. 째깍째깍. 혹시라도 제가 상처받지 않도록 주님, 제 영혼을 돌봐주십시오. 무엇보다 제 입술에 지혜를 주십시오. 째깍째..........!!!
이 집에 내 편은 하나도 없어.
니 아부지나 00이, 그리고 너도 똑같아.
펑!! 단호하고 냉정하며,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엄마의 감정 폭탄이 터졌다.
이번 폭탄은 꽤 세게 터졌다. 정신이 혼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