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대나무숲이 필요했다.
엄마에게는 친구가 없으셨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생이던 시절에는 그래도 집에 놀러오던 엄마의 친구들이 있으셨다.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삶의 질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낀 엄마가 가장 먼저 정리한 것은 친구였다. 가난이 무서운 건 단순한 결핍을 넘어 선택의 기회를 앗아간다는 점이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건사하기 위해 친구와 함께하는 즐거움을 잘라내 버리셨다.
'너네만 잘 되면 돼.'
엄마는 이 말을 주문처럼 외우곤 하셨다. 이 주문을 외시던 어머니의 표정에는 결연함과 처연함이 함께 느껴지곤 했었다. 어느날에는 여기에 약간의 불안함, 슬픔, 분노가 덤처럼 딸려오곤 했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외할머니를 외면하시던 그 전까지만 해도 엄마에게는 우리 가족 말고도 엄마의 엄마, 엄마의 여동생들과 남동생들이 있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마음을 보태던 '엄마의 식구'들이 버티고 있었다. 아버지가 외할머니를 외면하고 엄마 역시도 엄마의 가족들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에도 엄마는 누가 듣는지 개의치 않으시고 주문을 외셨다.
'얘네만 잘 되면 된다. 00이랑 ㅁㅁ이만 잘 되면 돼.'
어머니가 주문을 읊조리실 때마다 나는 잘 돼야 한다, 나는 잘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나 역시도 주문을 외곤 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엄마는 혼자셨다. 좁아터진 집구석을 오롯이 엄마가 지켜나가셨다. 아버지는 성심 양화점에서 상심만 키워가셨지만 그래도 친구들을 만나셨고 술 한 잔에 울분을 토하실 수 있으셨다. 머리가 다 큰 나와 동생도 집보다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즐거웠다. 당신의 편을 들어줄 친구와 외가 식구들에게 등돌린 엄마가 얻은 건, 좁은 집구석 하나였다. 물론, 그 집구석마저도 엄마의 명의가 아니라 아버지의 명의였다. 엄마의 이름으로 된 것은 단 하나도 없는 집을 엄마가 하루 스물네 시간을 꼬박 지키며 삼시세끼를 지어대고 계셨던 것이다. 그마저도 아버지가 가져오는 하루 몇 천 원의 돈은 이마저도 어렵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엄마'라는 이유로 엄마의 대나무숲을 통째로 베어내는 최악의 선택을 하실 수밖에 없었고 그 최악을 오롯이 엄마만 버텨내고 있으셨던 것이다.
엄마에게는 자기 감정을 터뜨릴 대나무숲이 남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에야 곱씹고 곱씹어서 엄마의 맥락을 조금이나마 더듬어갔지 엄마 입에서 '이 집에 내 편은 하나도 없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분노와 서글픔이 잔뜩 어린 엄마의 표정까지 더해져 나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꼿꼿하게 서는 듯했다. 동시에 눈두덩이가 꺼져들어가는 듯, 온 몸에 피로가 엄습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엄마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 주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마저도 엄마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던 건가 싶어 다소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게다가 아버지도 입원해 계셔서 마음에 여지가 없는 상황에 엄마의 독기 어린 항변은 꽤나 묵직한 한 방이었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계속 되어야만 한다. 지금 나도 포기하면 더 큰 파국일 뿐이다.
"엄마, 괜찮아요.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뭐 때문에 우리 엄마가 그렇게 느꼈을까? 혹시 00이가 뭐 이상한 말을 했어? 아님 내가 실수라도 했나? 그럼 내가 잘못했어요. 엄마 미안해.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인데요? 말해줘야 알죠"
"됐어. 너도 똑같은 송씨 집안 아들이야. 그냥 내비 둬."
"엄마, 근데 왜 엄마 편이 없어. 내가 엄마 편 많이 들어주는구먼. 엄마 왜 갑자기 마음이 이렇게 상한 거에요? 한 번 이야기나 좀 들어보고 싶네."
"나는 너네한테 짐 될까봐 아파도 병원 한 번 안 가고 어떻게든 약으로만 버티고 죽을 때 되면 그냥 죽을라고 이렇게 사는데 니 아부지는 자기 몸 제대로 간수도 못해서 병이 나고 수술까지 했어. 그랬더니 그래도 자기 아버지라고 쪼르르르 달려와서 너네가 니네 아빠한테 하는 거 보니까 나는 왜 이러고 살았나 싶다. 내가 아팠어봐, 너네가 이렇게 나를 신경이나 썼을까. 너네 나한테 어떻게 했어, 어? 너네가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이나 해줘봤어? 어? 그리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
연이어 터져나오는 엄마의 감정 폭탄을 일단은 터지도록 그대로 내버려 둔다. 엄마도 누군가에게 자기의 감정을 토해낼 존재가 필요할 뿐이다. 맞장구도 최소화, 일단은 그저 내가 받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엄마의 감정들을 껴안는다. 십수 년을 대나무숲 없이 살아온 엄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었고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의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