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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부부 May 18. 2022

히말라야로 도망치다_EP2

꿈의 무스탕

화실에서의 하루가 끝나는 4-5시쯤이 되면 녹초가 되어 광장 근처의 피자집으로 갔다. 지역 식당에 비해 가격은 세배가 넘게 차이가 났지만 스파게티와 피자, 맛있는 커피를 만원이면 먹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보기 힘든 깔끔한 인테리어는 박타푸르를 찾는 관광객을 유혹하는 공간이었다. 우리에게도 하루 숙박료보다 비싼 가격이었지만 일상으로부터 해방되는 의식이었다. 말하자면 이중생활이었다. 해가지기 전까지는 박타푸르의 주민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저녁시간은 주민들은 절대 가지 않는 피자집으로 갔으니 말이다. 화실 사람들에게는 들키기 싫은 모습 중 하나였다.


클래식이나 팝을 들으며 밥을 먹고 있으면 통유리 너머로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이들이 있었다. 꼬질꼬질한 모습에 더러운 망태 자루를 등 뒤로 맨 여자아이 셋이었다. 자루에는 사람들이 버린 페트병가득 주워 넣었다. 박타푸르에 온 첫날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이 아이들을 만났다.그만큼 작은 동네였다. 유리 너머로

‘이제 우리에게도 좋은 일을 할 때가 되지 않았니? 그 커피값 한잔이면 하루쯤은 쓰레기 줍는 일을 안 해도 되는데…’라는 눈빛으로 말이다. 피자집의 주인은 아이들을 발견할 때마다 불편해하는 손님들을 대신해 그들을 멀리 쫓아냈다. 아이들의 시선을 애써 매일같이 피했다.


하루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여자애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이것 또한 아이들의 전략이겠지만.. 대충 식사를 끝내고 남편과 밖으로 나와 원하는 것을 물었다. 영어도 제법 잘하는 아이들이었다.

“배고프니? 그럼 밥을 사줄 테니 식당으로 가자.”

“아니요, 우리 집에는 식구가 많으니까 돈으로 주세요.”

“돈은 안돼. 그럼 쌀을 사줄 테니 슈퍼로 가자.”

아이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상의를 하기 시작한다. 마음을 결정했다는 듯 뒷골목의 슈퍼로 우리를 안내한다. 통로에 가득 쌓인 과자나 군것질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쌀의 종류가 너무 많아 우린 뭘 사야 하나 한참을 보고 있는데 제일 똑 부러지는 여자아이가

“이 쌀을 살 거예요” 라며 들기도 버거워 보이는 쌀을 가리킨다.

포장되어있는 같은 무게들 중에 가장 비싸고 좋은 쌀을 골랐다.

“이거? 아주 좋은 쌀을 골랐네?”

“우리 가족도 좋은 쌀을 먹어야 건강하지 않겠어요?”

당연한 것을 요구하는 듯 당찬 목소리에 할 말이 없다. 맞는 말이지.

셋이서 쌀 한 포대 들고나가는 발걸음이 어찌나 가벼운지.. 그 쌀을 다시 되팔아 돈으로 바꿀지 가족들과 함께 좋은 쌀을 먹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곳 주민으로서 동네 아이에게 한 끼를 대접할 수 있는 것으로 그간의 미안함을 조금 덜어냈다.


탱화를 그릴수록 다른 사람들의 그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화실은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와 같다. 본인 파트의 채색이 다 되면 옆으로 넘겨 다음 공정을 기다린다. 탱화는 총 7개 단계를 거친다.

1. 스케치-도안을 그리는 과정

2. 컬러링-색으로 스케치를 채우는 과정

3. 라인 작업-세부 디자인을 그려 넣는 과정

4. 셰딩 작업-명암을 넣는 과정

5. 동식물과 같은 어려운 도안을 그리는 과정

6. 금박-금으로 한 번 더 칠하는 과정

7. 샤이닝 작업-금칠을 누르거나 긁어 내 더 반짝거리게 하는 과정

선생님의 그림은 다르다

이 화실의 막내인 안주는 1년째 컬러링 작업 중이었다. 10년 차인 아실리와 뭉아 아줌마는 셰딩 작업, 가장 고난도의 정교함을 요하는 부분은 30년 차인 찬드라 선생님이 그렸다. 탱화들이 비싼 값에 팔릴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탱화를 그린다는 것은 명상 그 자체였다. 붓질 한 번에도 많은 집중이 필요했다. 명상하듯 마음을 비우고 그리라는 선생님의 말이 점점 이해되고 있다. 크기에 따라 40일에서 3달에 걸쳐 하나의 탱화가 만들어진다. 우리가 몸을 배배 꼬며 힘들어할 때마다 선생님은 우리가 한 달 안에 이 모든 작업을 하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토닥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몸은 화실 안으로 오그라들고 있었다. 아침 10시부터 4시까지 주 6일간의 작업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고된 작업이었다. 천장화를 그리다 눈이 멀었다는 미켈란젤로가 떠오를 정도였다. 공부를 할 때도 이렇게 앉아있지를 못했는데 이것이 무슨 개고생인가. 명상을 하며 그리라던 선생님의 말과는 달리 우리 슬슬 화가 나고 있었다. 명상이고 나발이고… 늘 명상이 문제였다.


네팔에 왔으니 트레킹은 해야 한다는 핑계를 찾아냈다. 안나푸르나를 좀 걷고 오면 다시 힘을 내 탱화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찬드라에게 우리 그림을 잘 모셔달라 얘기를 하고 포카라로 떠났다. 도착 후 일주일은 포카라의 호수 앞에 누워만 있었다. 더우면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배가 고프면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밥을 먹고 쉬었다. 여행자들을 만나기도 하고 요가를 하며 쭈그러들었던 내 몸을 다시 늘려 놓는다. 네팔은 여행자들의 천국이다. ‘평화’와 ‘자유’그 자체인 이곳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게으른 우리가 푼힐을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행자들은 ABC베이스캠프까지 가야 하지 않겠냐고 얘기했지만 우린 무스탕을 가기로 했다. 우리의 여행은 가끔 사진 한 장으로, 혹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시작되기도 했다. 인도 시킴에서 만난 일본인 다카시는 무스탕을 찾아 네팔로 가는 중이었다. 함께 인도 네팔 사이의 까까르비타 국경에서 머문 숙소에는 무스탕의 사진이 아주 크게 걸려있었다. 우리도 무스탕에 가야 한다는 두번째 신호였다.


 1992년에 처음으로 개방된 이 고원은 중국과 네팔 경계에 있었다. 일 년 중 6개월만 개방되는 곳이라 흔치 않은 기회였다. 다카시를 먼저 보내고 그가 무스탕에 잘 도착했을지 계속 궁금하던 참이었다. 히말라야 엔트리 퍼밋을 받기 위해 관공서로 갔다. 무스탕에 가겠다고 하니 일인당 600불, 가이드까지 고용해야 갈 수 있다고 한다. 천청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 많은 돈을 내야 무스탕에 갈 수 있다니.. 퍼밋을 받는데만 너무 큰돈이 드는 것이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실망 가득한 우리를 보더니 묘안을 제시했다. 좀솜-까끄베니-묵티나트로 이어지는 안나푸르나의 둘레길은 어퍼 무스탕을 경계로 하는 곳이었다. 안나푸르나 퍼밋만으로도 당일치기 무스탕을 다녀올 수도 있고 평지가 대부분인 길이라 트레킹을 하는 것도 쉬울 것이라 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우리는 좀솜부터 시작해 평지를 걷기로 했다. 하루 10-20킬로, 5시간을 걸었다. 돌밖에 없는 언덕을 넘고 또 넘었다. 황량한 계곡에는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돌산 밖에 없는 곳에도 땅을 일구어 보리농사를 짓고 있었다. 색이 거의 없는 곳에서 연둣빛으로 일렁리는 곡식들은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마을마다 있는 불교사원인 곰파에서는 기도소리가 흘러나왔다. 길을 걷는 내내 많은 여행자들을 만났다.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안나푸르나 서킷을 돌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대단한 열정이었다. 저마다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나도 길상이와 함께 걷고 있었지만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떠다녔다. 나는 오빠와 하늘나라로 간 엄마와 아빠 생각을 했다.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생각나지 않던 기억들도 꺼내졌다. 잊고 싶은 기억들도 방금 일어난 일처럼 튀어나왔다. 추억과 망상들이 뒤섞여 내가 어떤 풍경을 지나고 있는지도 잊은 채 걸었다. 아빠는 여행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책장에는 늘 여행책이 가득했다. 특히 인도와 네팔, 티베트에 관한 책이 많았다. 이곳에서 어떤 걸 보고 싶으셨을까? 청보리 색의 아름다움, 펄럭이는 오색 깃발, 염소를 치는 목동, 계곡을 타고 흐르는 바람소리, 불경을 외는 단조로운 소리, 여자들의 베 짜는 소리, 스님의 푸자소리, 나귀의 목에 걸린 방울 소리까지. 모든 것이 나지막했다. 높은 것은 산 밖에 없었다. 아빠는 나를 통해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제일 좋아했던 마을은 ‘까끄베니’와 ‘종’이었다. 까끄베니에서는 강을 건너 무스탕 지역으로 잠깐 넘어갈 수 있었는데 무스탕은 지금까지 걸었던 길에 있던 마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울퉁불퉁한 길로 이어진 마을에는 바람을 막으려 쌓은 돌담의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은 바람과 돌만 가득한 곳이었다. 이따금 강을 건너는 구간이 나올 때마다 길상이는 암모나이트를 찾겠다고 바닥을 뒤적였다. 결국 암모나이트 등 정도가 찍인 돌멩이 하나를 찾아내고는 보물같이 애지중지했다. 그 모습이 어린 소년 같아서 내가 마치 엄마라도 된 듯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종은 거의 트레킹의 마지막 구간이자 반환점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묵티나트까지 걸은 뒤 다시 유턴을 해 좀솜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북적이는 묵티나트에 비해 한적한 동네 마을인 종에 마음을 뺏겼다.

머물렀던 숙소의 소남 아줌마의 음식 솜씨는 대단했다. 정갈한 주방에서 달바트나 달걀, 감자를 삶아 내어 줬는데 달그락 소리를 내던 부엌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안정되었다. 큰 수납장에 모든 세간 살림이 잘 정돈되어 있었는데 요리를 할 때마다 그것을 하나씩 꺼내 썼다. 그녀는 낮에는 베를 짜고 끼니때가 되면 우리의 밥을 챙겨줬고 저녁이면 양을 치고 돌아온 남편을 돌봐줬다. 나는 그녀가 수행자처럼 느껴졌다. 돌과 바람만 가득한 언덕에서 모든 사람을 돌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이틀은 그곳에 틀어 박혀 그녀와 시간을 보냈다.

소남과 간식

우리가 걷던 대부분의 길은 평지였지만 마을 사이를 넘을 때만큼은 오르막길 나왔다. 낮은 풀만 깔린 언덕을 거친 숨을 몰아쉬여 넘을 때마다 길상이는 손을 잡고 나를 끌어줬다. 포기를 잘 아는 나란 인간은 길상이가 없었다면 다음 마을까지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내 옆에 남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더 높을 산도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물론 잠시 동안만). 나는 남편과 평생 함께 할 수 있을지 늘 의문이 있었다.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지 않는가? 각자의 기준에서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도 너무나 많았다. 싸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기분이 상해 상처 주는 말들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걱정이나 분노, 의심이 이 길 위에서는 너무나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우리는 분명히 살면서 어려운 일을 겪을 것이다. 그때마다 이 길을 걷고 걸으며 했던 생각들을 떠올리면 위안이 될 것 같았다.

‘길상이는 그때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지’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사이에 그런 힘이 생겨났다. 그리고 트레킹의 종착지인 묵티나트를 돌아 나오며 다시 탱화를 그릴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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