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켈리의 벽화는 꽤나 깊은 인상을 심어 준 모양이었다. 나는 네팔에 탱화 학교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흘려들었는데 길상이는 기억하고 있었다.
인도와 네팔 국경인 까까르비타에서 출발한 버스는 포장과 비포장도로를 번갈아 달렸다. 계곡을 따라 아찔한 레이싱을 10시간 넘게 했다. 인도만큼이나 정신없는 카트만두에 왔다. 여행자들의 천국인 이곳은 값싼 물가와 세계 각국의 요리들, 한국음식, 볼거리, 쇼핑 천국 그 자체였다. 지진의 흔적이 선명했지만 울퉁불퉁 비틀어진 길이 무슨 대수냐는 듯 활기 넘치는 사람들이 오갔다. 전 세계의 이상한 차림의 여행자들은 다 모여있었다. 히피 같은 서양인들과 중국의 단체 관광객, 세련된 커피숍, 화려하게 장식된 카펫과 탱화들까지. 눈이 돌아갈 만큼 알록달록한 첫인상을 받았다. 고층 건물 대신 붉은색의 사원 지붕들과 돌로 쌓은 탑들은 사람들의 약속 장소인 것인지 어느 사원 앞이나 인파들로 가득했다. 혼돈 그 자체인 이 도시에서 며칠을 쉬고 나서 우린 학교를 찾아 나섰다. 3개월짜리 비자를 받아 놓았으니 학교에 가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탱화 상점 몇 군데에 들러 탱화 학교에 대해 물어봤지만 구매력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손님에게 친절히 가르쳐 주는 이는 없었다.
“여기 말고 박타푸르에 가봐요. 학교는 다 거기 있어요. “
오래된 도시 박타푸르. 네와르 왕국의 수도였던 도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 도시안으로 들어가는 자체 만으로도 입장료를 내야 했다. 닥터스레인지에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카트만두 골목을 돌아다니며 손을 고쳐줄 스승님을 찾는 것처럼 우리 역시 탱화 스승님을 찾아 박타푸르로 향했다.
박타푸르의 마을 입구는 지진으로 무너진 사원의 복원이 진행 중인 것이 의심이 들 정도로 곳곳에 돌무더기가 쌓여있었다. 광장을 지나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야지 온전한 모습의 사원들을 볼 수 있었다. 붉은 지붕을 얹은 사원의 끝을 올려다보려 고개들 드는 순간부터 그 자태에 압도당하게 된다. 냐타폴라사원은 5층으로 된 큰 탑이 었는데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박타푸르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붉은 지붕들이 빼곡한 고대도시는 시간을 초월하고 있었다. 탱화 학교를 찾기도 전에 우리는 박타푸르에 빠져들었다. 곧 무너질 것 같이 삐걱대는 상점과 광장에서 마시는 차 한잔으로도 이곳에 매료되기 충분했다. 오래된 도시는 분명 영험한 어떤 기운이 있었다. 남자들은 종이배 같은 모자를 쓰고, 여자들은 붉은 옷을 주로 입었다. 관광객들은 낮에 도시를 방문했다가 오후가 되면 모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저녁이 되자 우리는 박타푸르에 홀로 남겨져 시간여행을 하는 이방인으로 여겨졌다. 네와르 인들의 성스러운 도시 속으로 우린 들어와 있었다.
가운데 나타폴라사원
골목들 사이에 자리한 여러 탱화 상점에 들어가 그림을 배울 수 있는지 물었다. 그중 도자기 광장 앞 한 상점에서 당장 수업이 가능하다며 화실을 보여주었다. 1층은 관광객이 잘 볼 수 있도록 탱화를 그리는 퍼포먼스였다면 2층은 작업실이었다. 작은 평수에 갇혀 그림만 그리는 곳이었다. 하루 7시간. 쉬는 날은 일요일 하루였다. 학교라고 하기엔 작은 방에 불과했지만 탱화를 그릴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관광사무소로 가서 하루짜리 박타푸르 관람권을 체류증으로 바꾸었다. 3개월 비자가 끝날 때까지 이곳 출입이 가능해졌다. 탱화 학교에 다니는 동안만큼은 이곳의 주민으로 신분을 바꾸었다.
도자기 광장과가까운 곳에 호텔을 하나 계약했다. 최소 한 달은 머무를 예정이라고 하니 하루 2만 원이라던 방은 8000원까지 내려갔다. 공용화장실이 아니라 개인 욕실도 있었고 테라스와 루프탑도 있는 마음에 쏙 드는 숙소였다. 루프탑에 오르면 냐타폴라 사원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신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뭘 하는데요?” 호텔 주인이 물었다.
“탕카(탱화)를 그릴 거예요”
1층 상점
첫 등교날 탱화 상점의 2층 작업실로 올라갔다. 세네 평 남짓되어 보이는 작은 화실에는 방석 하나와 캔버스 하나씩을 붙잡고 그림에 열중하는 이들이 있었다. 젊은 여자들이 우릴 힐끔 보며 까르르 웃었다. 남편 긴 머리가 우스운 모양이었다. 스승님인 찬드라는 채색을 한 번 해 보라며 우리에게 허접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탱화의 도안이 인쇄된 종이를 나무판에 고정시키고 붓질을 하기 시작한다. 컬러링북과 비슷했는데, 사용해야 하는 색깔이 정해져 있어 찬드라에게 끊임없이 질문해야 했다. 얇은 붓으로 도안 속의 산스크리트어를 채워 나갔다.
우리 뒤에 앉은 학생들과 찬드라의 부인인 뭉아는 남편과 나를 번갈아 곁눈질하며 키득거린다.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손짓 발짓으로도 대충 그 말들을 이해했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동네 기념품 샵에서 네팔어를 배울 수 있는 책을 한 권 샀다. 이곳이 아니면 써먹을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은 네팔어였지만 작은 책 한권으로 으로 우린 화실 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우린 매일 출근하듯 똑같은 일상을 보냈다. 아침은 박타푸르 밖의 식당에서 해결했다. 나는 주로 달바트를 먹었다. 손으로 쌀을 채소반찬을 섞어먹으면 더 맛있었다. 게다가 반찬은 무한리필이었으니 딱 내 취향이었다. 남편은 손으로 먹는 내 모습이 불결하다며 포크로 먹는 쵸민(볶음면)을 시킨다. 우리의 취향은 같은 적이 없다. 낯선 곳에서 남편의 모습은 더욱더 낯설다. 특유의 예민함이 견디기 힘들다거나, 겁쟁이에다가 가끔 알 수 없는 포인트에서 남들과 언쟁을 하기도 한다. 익숙해 질 때도 된 남편인데 풍경만큼이나 낯설다. 내가 불결하다니..
10시쯤 든든한 아침을 먹으면 오후 4시까지는 화실에서 꼼짝없이 갇혀있었다.
삼일 동안 채색을 하고 나니 종이 한 장을 겨우 다 완성했다.
“에라이 람로! (very good!) “
화실 식구들을 우리의 컬러링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드두쿄(허리 아파), 숀 나 람로?( 숀 그림은 안 좋지?)”
허리 아프다는 엄살을 피우며 내가 길상이 그림을 조금 흉을 보자 화실 안의 여자들은 자지러지게 웃었다. 머리가 긴 길상이를 흉내내기도 하고 허리와 다리가 아파 낑낑대는 우리를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는다. 몇 년째 같은 자세를 하고 그림을 그리는 본인들이 얼마나 힘든지 아냐는 듯 허리와 팔다리를 가리키며 힘든 표정을 지었다. 화실은 여자들의 웃음소리와 수다로 조용할 틈이 없었다. 하루 7시간을 정적 속에서 때론 웃음 속에서 함께 있다 보니 서로가 편해졌다. 이제 남편 자랑, 자식 자랑, 동네 사촌에, 할머니 생일 사진까지 공유하는 사이가 되어간다.
찬드라는 이제 진짜 탱화를 준비가 되었다고 했다. 허접한 종이를 벗겨내고 무명천에 밀가루 풀을 직접 먹여 말린 캔버스를 만들어 줬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촉감이 손끝으로 만져졌다. 평소와 똑같은 물감과 붓으로 채색을 하는데 완전 다른 세상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