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가 없는 부엌에 어떤 재료가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선반에 놓인 감자와 양파 몇 알, 바닥이 드러나기 직전인 밀가루. 가스레인지 옆 소금과 간장.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게 다였다. 단순한 식재료 덕에 메뉴를 고민할 필요는 없어졌다.칼국수가 좋겠다. 물론 만들어 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이라도 된다면 참고할만한 레시피를 찾아봤을 테지만 불가능한 일이니 머릿속에 저장된 근본없는 지식들을 억지로 꺼내 재생해 본다. 왠지 익반죽이 좋을 것 같고,, 실온에 두고 숙성시키면 더 쫄깃하지 않을까? 어디서 본 것 같으니 그렇게 하기로 한다.
야채 육수에 소고기맛 다시다를 넣어 국물을 끓여놓고 밀가루 반죽은 잘 펴서 접은 다음 칼로 썰어준다. 군대에서 요리를 했던 남편은 뚝딱뚝딱 면발을 만들어 냈다. 대단치 않은 메뉴에 간단하게 저녁상이 차려졌다. 나는 밥시간을 알리는 종을 흔들었다. 코를 킁킁거리며 들어오는 사람들은 냄비에 가득 담긴 면발을 보자마자
“뚝바를 끓였네요? “라고 했다.
“이건 한국 칼국수예요. 맛은 똑같을 거예요.”
“맛도 뚝바 맞는데요? 한국도 뚝바를 먹네요! “
라마는 이 산속에서 한국음식을 먹는다고 좋아한다. 다른 것이라고는 무채를 썰어 식초와 소금, 고춧가루를 버무린 무생채를 식탁에 올린 것이었다. 여분의 양념을 가지고 다니길 잘했다. 켈리는 늘 먹던 뚝바보다는한국 김치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신이 났다. 칼국수에 김치 조합은 누구라도 거부할 수 없는 맛이지.
배부른 저녁식사를 마치고 라마는 말했다.
“이제부터 부엌은 엘리와 숀이 담당해요! 더 많은 한국음식이 먹고 싶어요! 모두들 동의하는 거죠? “
페인트칠에 부엌일까지... 일이 많다고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요리하는 것이 좋은 길상이는 입이 귀에 걸렸다.
“오늘 새로운 봉사자 두 명이 올 거예요. 아메리칸 “
이 두 사람의 등장으로 수도원은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증권사에 일하던 시와, 이탈리안 요리사 죠쉬는 미국 탄트릭 절에서 2년간 수행을 끝내고 여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대가족이 되었다.
이 둘과 켈리는 식사시간마다 매번 다른 주제로 토론의 장을 열었는데 토론을 한다는 것이 익숙지 않은 우리들은 보통은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 강아지를 중성화시키는 것은 나쁜 일이야. “
“ 우리가 내는 식사 비용에는 차등을 둬야 해, 난 적게 먹잖아?”
“ 나는 오늘 일하고 싶지 않아”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별일도 아니었지만 평소의 식사시간보다 30분은 더 긴 시간을 식탁에서 보내야 했다. 안 그래도 빠른 영어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토론의 장까지 열리니 어느새 우리 눈에는 초점이 없어진다. 이 고요한 수도원에서 경망스럽게… 눈치껏 행동하는 것이 편한 우리는 티도 내지 못하고 먼산만 바라보며 음식만 오물거린다.
‘매일 할 말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나는 대부분의 주제에
“응, 네 말고 맞고, 네 말도 맞아”로 대답했다. 나는 의견을 전달하기에 부족한 영어실력이기도 하지만 정말 내세울 의견이 없다. 각자의 문화권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한눈에 보였다. 영어를 거의 못하는 길상이는 이미 마음을 놓은 지 오래다. 밥을 먹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모난돌이 안 되는 것이 편한 우리와는 달리 이들은 작은 주제에도 본인들의 주장을 내세워야 직성이 풀린다. 하루는 켈리가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는 왜 라마에게 한 번도 싫다고 얘기하지 않아?
“그게 무슨 뜻이야? 라마가 시켰으니까 난 그 일을 하는 건데?”
“내 말은 하기 싫은 일도 있을 거 아니야, 너희들은 부엌에서 너무 고생하는데 왜 바꿔 달라거나 하기 싫다 말하지 않는 거냐고”
“음.. 우린 주방에서 음식 하는 일이 좋아. 그리고 싫다고 말할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본 것 같네? 라마는 우리보다 어른이고 여기 주인이잖아. 아시아 문화일지도 모르지만 어른의 의견에 반대하는 건 우리에게 쉽지 않은 일 같아”
“너희가 좋다면 상관은 없는데, 난 가끔 불편할 때가 있어. 라마는 너희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한다는 거 아니? 그런데도 아시아 사람들은 무조건 YES 라니까?”
왜 NO라고 말하지 않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이었다.
우리는 밥도 하고 페인트 칠을 하느라 하루가 고된 적이 많았다. 남는 시간에 트레킹을 가거나 자유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일이 많으니 해 가지고 나서야 방으로 들어가 쉴 수 있었다. 우리끼리 힘들다 할 것이 아니라 라마에게 얘기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라마도 여행자 사이의 업무 균형이 깨졌다 생각했는지 우리는 다음날 업무를 재 분배하게 되었다.
“숀과 엘리가 식사 당번을 하느라 힘들었으니, 이제부터 죠쉬가 밥을 담당하는 것이 좋겠어요.”
일이 줄었으니 기뻐야 하는데 길상이는 라마의 결정에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며칠간 애정을 쏟았던 부엌에서 해고를 당하는 느낌이라 했다. 길상이가 그만하고 싶었던 것은 주방일이 아니라 페인트였는데… 눈치없는 라마.
우린 재 할당된 업무에 또 한 번 YES라고 답했다.
오늘 아침도 아랫집 청년에게 받은 우유 한 병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주방을 꿰찬 죠쉬가 아침 댓바람부터 버터를 만들겠다 했다. 버터를 어떻게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담당자의 권한으로 팬케이크에 버터까지 만들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아직 부엌 사정을 잘 모르는군..’
참견하고 싶었지만 그도 계획이 있을 것이다. 프라이팬의 코딩이 다 벗겨졌으니 팬케이크는 조금 힘들 수 있을 것이라고만 귀띔해주고 우린 마당에 나가 아침해의 따듯한 기운을 듬뿍 받았다. 평화로운 아침이다.
조시는 본인의 텀블러에 우유를 넣고 한참을 흔들며 수도원 마당을 돌아녔다. 버터를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전문 요리사가 차려주는 식탁에 모두들 기대가 크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식탁에는 텅 빈 우유병과 고작 한 줌의 버터가 올려져 있다. 조시는 우리에게 아침의 결과물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이게 진짜 버터지!! 어때? 냄 새한 번 맡아봐!” 라며 의기양양해한다.
“냄새 좋다. 그런데…. 우유를 다 쓴 거야???”
그 많은 1.5리터 우유를 다 쓰다니.. 하루 종일 챠이를 마셔야 하는 우유로 버터 한 줌을 만들다니… 보릿고개에 태어났으면 큰일 날 녀석이었다.
“하루 종일 먹을 우유로 지금 버터를 만든 거야? 그럼 사람들은 뭘 마시라고!!”
길상이는 나에게만 화를 낸다. 정작 죠쉬에겐 한마디도 못하고 한숨을 푹푹 쉬며 ‘저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난 그런 남편이 웃겨서 기분 풀으라 위로를 했다.
“내일 아침이면 또 우유가 올 텐데 뭐, 기분 풀어”
“죠쉬는 이기적이야.”
“네가 봤으면 하지 말라고 하지 그랬어.”
“난 영어를 잘 못하잖아. 몰라. 말도 하기 싫어”
음식이 부족했던 아침
켈리 말이 맞았다. 우리는 싫은걸 싫다고 말을 못 한다. 둘 다 억지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성격이었다. 싫은 소리가 아니라 사실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해줄 수 있었는데 말이다.
버터와 팬케이크, 그리고 우유가 빠진 홍차는 모두가 먹기에는 적은 양이었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길상이도 팬케이크에 버터 한 스푼을 먹고 맛있다고 웃어 보였지만 말하지 못한 속내는 달랐다. 어색하게 웃는 길상이의 표정이 내 눈에는 다 보였다.
이어진 점심메뉴도 처참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렌틸콩과 양념을 모두 써서 렌틸 수프를 만들었는데 쓴 재료에 비해 인당작은 밥그릇 한공기 정도의 양이 돌아왔다. 미국인의 주식이 쌀이 아니어서 그런 것인지 혹은 재료를 아끼지 않는 큰손 요리사여서인지는 모르겠다. 부엌의 맛있는 재료를 몽땅 쓰고도 수프 한솥이 끝이라니…. 길상이는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물론 나만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가난을 겪은 우리나라는 적은 재료로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가 만든 국물이 있는 음식이나 볶음밥은 수도원 식구 모두 넉넉히 먹을 수 있었다. 한국음식은 가성비가 참 좋은 음식이다.
연이어 가성비가 떨어지는 저녁식사까지 마친 뒤 죠쉬는 이제 요리가 하기 싫다고 선언했다. 라마는 활짝 웃으며 길상이를 지그시 바라본다.
“역시 주방일은 숀과 엘리가 하는 것이 좋겠어요! 한국인들이 더 많이 도와줘요. 괜찮겠어요? “
다음날 요리사로 다시 복직된 남편은 배낭에 쑤셔 넣었던 다시다와 고춧가루를 꺼내 주방에 가져다 놓았다. 길상이는 주방을 다시 접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