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빅의 삼텐 수도원을 찾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웠다. 네팔의 국경 근처에 있는 히말라야 산속의 수도원은 관광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곳의 정보를 찾는 것은 제아무리 구글일 지라도 한계가 있었다. 워크 어웨이 웹페이지 속, 수도원 사진 밑으로 달린 선배 여행자들의 리뷰만이 그곳에 대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전부였다. 별점 5점이 찍인 경험담을 읽으니 일단 위험요소는 없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 수도원의 라마스님은 워크 어웨이 쪽지를 통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 줬다. 다즐링에서 셰어 택시는 하루에 두대가 있으니 오전 차를 이용할 것, 마지막 정류장에서 내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수도원에 쉽게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림빅으로 가기 전 다즐링에서 몇 일간은 입맛에 맞는 음식들로 호강을 했다. 인도 여행 내내 먹어야했던 탈리와 뿌리, 모든 음식에 뿌려지는 마살라 향으로 지쳐있었는데 모모 (만두)와 뚝바(얼큰한 칼국수)만으로도 다즐링을 여행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2월의 날씨가 너무 춥다는 것만 빼면. 호텔을 두 번이나 옮겼지만 춥기는 매 한 가지였다. 몸을 짓누를 정도로 무거운이불과 담요를 시루떡처럼 덮어봤지만 고산의 추위를 막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림빅은 좀 덜 추우려나.
다즐링에서 일주일쯤을 지낸 뒤 림빅을 향해 달렸다. 6시간이 걸릴 거라 했던 택시는 히말라야의 온 마을을 들리느라 8시간이 걸렸다. 구글 지도로는 4시간이면 도착한다고 했는데 이런 오지에서 길 찾기 정보는 믿을 것이 못된다. 절벽을 아찔하게 달리다가도 무한 에스자 코스를 돌아서 계곡물을 아슬하게 건넜다. 산 중턱마다 계단식 농사를 짓고 있었고 반짝이는 비닐로 포장된 감자칩과 코카콜라가 대롱대롱 매달린 슈퍼는 어울리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서야 종점인 마을에 도착해, 수도원이 있는 산 중턱으로 우릴 데려다 줄 트럭을 찾아 나섰다. 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손님이라고는 없었다. 한 아저씨의 도움으로 수도원으로 가는 트럭을 얻어 탈 수 있었다. 제대로 된 길은 없었는데 그마저도 사람은 내리고 트럭만 올라가야 하는 숲길이 잦았다. 짐칸에는 곡물 포대와 함께 싣려 진우리말고도 여자아이 두 명이 더 있었다. 기사의 지시에 따라 트럭에 올랐다 내렸다 하는데 눈치 빠른 아이들은 내려야 할 타이밍에 맞춰 눈썹을 치켜올려줬다. 생김새는 본인들과 너무 닮았는데 현지 말을 못 한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사실 다즐링에서부터 사람들의 외모는 우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실리구리만 해도 눈이 큰 인도 사람들 틈에 스스로 이방인이라 느껴졌는데 다즐링과 림빅의 사람들은 동아시아의 얼굴을 하고 있어 우리가 옆 동네에서 왔다 해도 믿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의 이동으로 지쳐갈 때쯤 마을에서도 산 중턱에 낯선 큰 기둥 두 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민들의 집과는 다른 외형이 수도원에 도착했음을 확신했다. 입구부터 길을 따라 쌓은 돌 표면에는 빨강, 노랑, 주홍, 파랑, 초록색으로 새겨진 진언 ‘옴마니반메홈’이 있었다. ‘연꽃 속의 보석이여’라는 뜻의 진언이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글자의 모양과 그 음은 귀에 익었다. 이 다섯 가지 색깔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을 당시 몸에서 발현된 색이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인도에 속해있었지만 네팔과 부탄을 가까이하고 있는 불교문화 색이 짙은 곳이었다. 우리는 이 마을의 가장 깊고 높은 곳 삼텐 수도원에 도착했다.
맨 먼저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핑크색 머리의 프랑스인 켈리였다.
“라마는 마을에 내려갔어요. 부엌에서 조금만 기다려요”
시커먼 가마솥 아래 장작이 타고 있었다. 어찌나 정겨운 모습인지 한국의 시골 어디쯤 와 있는 착각이 들었다. 이곳이 좋은 곳이든 나쁜 곳이든 간에 적어도 하루는 묵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부엌 옆의 작은 공방에서 가구 만드는 일을 하는 도지와 다와도 곧이어 들어왔다.
“ 어디서 왔어요?”
다와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해 별 말을 안 했지만 도지는 유창한 영어로 우리 신상을 궁금해한다.
“한국이요, 남쪽”
“이번엔 한국인들이군요, 우리랑 이렇게 닮은 자원봉사자는 처음이에요”
장난기 가득한 도지는 우리의 외모가 반갑다며 싱글벙글 웃어댔다.
마지막으로 라마가 입장한다.
“엘리, 숀! 한국인 자원봉사자라니! 나는 이 삼텐 수도원의 스님, 파상이에요, 라마라고 편하게 부르면 됩니다. 오늘은 환영하는 의미에서 다 같이 만두를 빚어먹읍시다. “
머리만큼이나 시원한 성격 덕에 작은 공간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우리는 배정받은 식사를 하기 전 작은 방에 짐을 풀었다. 삐걱대는 나무 바닥에 나무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것이 다였다. 물론 문도 있고 창문도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어찌 되었든 사방에 벽이 있으니 우리만의 공간이 생겼다. 바람 정도는 막아줄 것이고 사람들도 나빠보이지 않으니 일단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부엌으로 향한다. 그들은 잘 훈련된 요리사처럼 분주하게 만두 만들 준비로 바빴다. 단출한 살림은 전등의 약한 불빛 때문에 더 초라해 보였다. 아귀가 맞지 않는 문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차가운 저녁 공기가 들어왔다. 다행히 아궁이에 타는 장작이 열기 덕분에 몸이 노곤해지고 있었다. 우리도 도울 것이 없나 두 팔을 걷어 부치고 도지 곁을 서성인다. 모모는 네팔과 인도 북부 어디서나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특히 인도 북부의 모모는 고기를 거의 쓰지 않는 채소 모모가 많다. 몇 가지 재료를 볶고 만두피에 싸서 쪄냈을 뿐인데 한국의 만두보다도 맛있다. 사 먹는 모모도 맛이 일품이었는데 만드는 모모는 더 맛있을 터였다. 길상이와 나는 만두 꽤나 뜯어본 한국인이지만 만들어 본적은 거의 없다. 이들이 준비한 반죽을 가지고 몇 분을 씨름한 후에야 쭈글쭈글한, 그마저도 구멍이 난 모모를 만들어 냈다.
만두가 쪄지길 기다린 지 십여분, 5층이나 쌓인 은색 알루미늄 찜기는 한국에서도 흔히 보던 물건이었지만 이렇게 반가운 적은 없었다. 한층 한층을 들어낼 때마다 만두가 뿜어내는 하얀 김으로 어두웠던 공간이 이제는 뿌옇게 가득 찼다. 여섯 명이서 만두를 다섯 판을 다 해치우고 찜기의 마지막 아래칸에 흘러내린 만두의 국물과 남은 만두피를 이용해 칼국수를 만들었다. 여섯 명이 먹기에 가난한기 짝이 없는 식탁이라 생각했는데 배부르지 않은 이가 없었다. 몸과 마음이 수도원의 부엌으로 녹아들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떤 일을 할지 함께 의논할 시간이 왔다. 처음 경험하는 워크 어웨이에서 어떤 일을 할지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우리가 이곳에서 지낼 조건은 아래와 같았다.
v 빠듯한 살림이다 보니 식료품 비용으로 일주일에 일인당 17000원씩 내기
v매일 하루 5시간. 청소와 페인트칠 하기
v강아지 밥 챙겨주기
v식사 당번 때는 밥하기
켈리는 수도원 내부의 벽화작업을 하느라 식사시간외에는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고 도지와 다와는 쉴 틈 없이 공방에서 가구를 만들었다. 그러니 라마가 말한 일을 하고도 제일 한가한 사람은 우리 둘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트레킹을 해도 되고 마을로 내려가 자유시간을 가져도 상관없었다. 구두로 이루어진 계약이었지만 이곳에서의 한 고비를 넘긴 것 같아 긴장이 풀린다. 여행한 지 넉 달이 넘어가면서 조금 지치기 시작하던 시기였는데 열흘 동안 이곳에서 일을 하며 이곳에서 쉬어갈 계산도 했다. 수도원만큼 쉬기 좋은 곳도 없을 테니까.
저녁 8시가 조금 넘으니 모두들 짧은 ‘굿 나이트’과 함께 각자의 방으로 갔다. 전자기기라고는 라마의 오래된 노트북과 한 명만 쓸 수 있는, 그나마도 느려 터진 포켓 와이파이가 전부이니 해가지면 잠을 자거나 책을 읽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었다. 여행자에게 와이파이는 생명과도 같은데 이곳에서는 애초에 온라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도 그것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인터넷 무소유를 실천하게 생겼다. 아직 이곳이 얼떨떨한 우리만 부엌에 남아 꺼져가는 아궁이의 불씨를 한참 지켜봤다.
“우린 대체 어디에 와있는 거냐… 나 잘 한 선택 맞겠지? “
“모험이라며. 지내다 보면 알겠지. 난 사람들도 좋아 보이던데?”라고 말하는 의젓한 남편에게 기대어본다.
여행자들 사이에 떠도는 흉흉한 괴소문들때문에 사람들의 과한 친절은 늘 의심의 대상이다. 특히 인도에서는 더욱더. 하지만 이렇게 맛있는 만두를 먹여놓고 우리의 장기들을 빼갈 리 없었고, 새우잡이 배에 팔아넘길 사람들은 아닌 것 같으니 복잡한 생각은 내려놓기로 한다. 남은 걱정은 오늘 밤이었다. 방이 얼음장같이 차가울 것은 불 보듯 뻔했다.